철기 시대

 컴퓨터가 386, 486으로 넘어가면서 업체들은 상자곽들끼리의 전쟁이 아닌 보다 리얼한 그래픽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바로 텍스쳐 맵핑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텍스쳐 맵핑은 간단하게 말해서 직선에 의해 이루어진 일종의 입체도형인 폴리곤 물체의 표면에 벽지를 바른 것이다. 지금은 3D 가속에 힘입어 각종 광원효과들까지 묘사되지만 밋밋한 상자곽들을 전차나 비행기라고 "가정하고" 시뮬레이션을 즐기던 당시에 실제와 비슷한 피부가 덧씌워졌으니 당시의 시각적인 놀라움은 3D카드가 처음 나왔을 때 만큼이나 획기적인 것이었다. 그렇지만, 필자 개인적으로 생각하건대 시뮬레이션의 완성도면에서는 별다른 진전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어떤면에서는 기술력의 한계 때문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 개념상 도리어 전작에 못미치는 작품들이 많이 나왔다. 그래픽의 진보와 완성도의 후퇴, 이것이 가져오는 결과가 무엇이었을까. 두 가지 대표적인 예를 들어보겠다.

 오리진에서는 용병비행단을 소재로한 스트라이크 코맨더를 내놓았다. 지금은 3D동영상이 들어갈만한 스토리 동영상에 2D만화를 집어넣었고 스토리라인에 의한 전개등등 비행시뮬레이션으로서는 참신한 발상과 외적인 화려함이 갖추어진 제품이었다. 초기에는 상당한 호응을 얻은 것으로 생각되지만, 스토리라인 방식 진행의 한계란 한번 깨고나면 또 하고 싶은 마음이 사그라든다는 것이다. 스트라이크 코맨더의 생명은 그리 길지 못했다. 불과 수 개월밖에 주요 생명을 유지하지 못하는 일반 게임들과 달리 에이스 시리즈나 팰콘3.0등의 전통적인 비행시뮬레이션들이 수 년씩 매니아층을 형성하고 있는데서 볼 수 있듯이 비행시뮬레이션은 그 생명력이 긴 것을 특징으로 하는데, 화려함으로 무장하고 초기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스트라이크 코맨더의 생명이 비교적 짧았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사실 스트라이크 코맨더는 시뮬레이션의 형식은 취했지만 이미 팰콘3.0의 사실성에 익숙해져버린 유저들에게는 같은 F-16을 다루었음에도 불구하고 비현실적인 무장과 비행모델등이 상대적으로 두드러져 그리 좋지 못하게 평가되었다. 그리고 마치 전투비행은 수단일 뿐이고 엔딩보기가 주목적이라는 듯한 단일 스토리라인이라는 형식이 비행시뮬레이션 매니아들의 정서와 맞지 않는 면이 있었다. 단일 스토리라인에서 엔딩을 보자면 죽었을 때 리셋을 하거나 에디트를 해야 되는데 그러면 이미 그건 비행시뮬레이션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 당시 약간의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었는지 어떤지는 알 길이 없지만, 5.25인치 플로피 디스켓 시절에 무려 40메가를 넘어가는 하드 용량을 차지할 정도의 초호화판(왜냐하면 그 용량 대부분이 스토리 만화와 사운드였다) 제품이었지만 지금 시점 에서 스트라이크 코맨더를 시뮬레이션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다. 아니, 그런 것이 있었는지 조차 모르는 사람도 꽤 된다. 여하튼간에 평판은 시간이 갈수록 나빠졌지만 상업적 성공은 했는지 오리진은 퍼시픽 스트라이크와 윙즈 오브 글로리라는 리얼리티는 약간 떨어지고 RPG성이 가미된 독특한 종류의 제품을 몇 개 출시했다.

 MPS에서는 F-15 II의 후속작으로 텍스쳐 그래픽으로 무장한 F-15 III를 출시했다. 외견상 F-15III는 팰콘3.0과 유사한 점이 많았는데 리얼리티 뛰어난 전자장비(사실 전자장비면에서는 F-15 III나 제인스 F-15나 그 표현방법, 난이도, 조작기능등이 거의 같다), 다소 거칠고 어둡지만 현실감 있는 그래픽등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모뎀플레이도 지원했다. 반면 커리어 모드에서 조종사는 아군의 지원도 없이 단독으로 수백 마일 적진에 침투하여 임무를 성공하고 돌아와야 하는 비상식적인 모습을 보였는데 소위 "람보 미션"으로서 많은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수 년전부터 비행시뮬레이션의 전투에서 아군들의 등장과 협조는 이미 당연한 것이 되어있었는데 이 단점 하나 때문에 이 제품에 쏟아부은 많은 제작비를 날려먹었다는 소문이 전해진다. 더욱이 F-15 III는 걸프전 캠페인도 포함하여 걸프전 특수까지 노린 제품이었는데 말이다. 이런 이해안가는 실수를 했던 이유는 아직도 미지수다.


F-15 III

 스트라이크 코맨더와 F-15III의 두가지 예는 무엇을 말하는가. 전혀 다른 엔진을 돌리는 전혀 다른 비행시뮬레이션이라도, 매니아들은 항상 동일한 기준에 입각해서 평가를 한다. 비행시뮬레이션이 실제 환경을 똑같이 묘사하지는 못하지만, 어느정도 이루어진 기존의 완성도 있는 작품은 항상 비교대상이 된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비행시뮬레이션 매니아들은 다른 시뮬레이션을 접할때 마다 "앞으로의 얼마간의 시간을 죽여줄 새로운 게임을 구했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시뮬레이션이든지 기본적으로 같은 세상인데 단지 "다른 기종의 항공기에 탑승한다"는 식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을 감안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두 제품 모두 팰콘3.0의 경쟁상대라는 측면을 가지고 있었지만 팰콘3.0이 매니아들의 눈을 높여놓지만 않았더라면 그자체로서 상당한 호평을 받았을만 한 작품임에는 틀림 없다. 그러나 1등 이외에는 모두가 패자일 수밖에 없는 냉엄한 현실에서 팰콘3.0의 이후에 출시된 두 제품은 팰콘3.0의 그늘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여하튼, 스트라이크 코맨더는 그자체가 워낙 상업성이 짙은 제품이라 논외로 치더라도, F-15 III는 팰콘3.0을 제외한다면 나름대로 매우 뛰어난 그래픽과 사실성(팰콘3.0보다 그래픽은 훨씬 뛰어남)을 추구하고 있었던 것임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시뮬레이션에서 제공했던 환경중에서 단 한가지 요소인 윙맨을 제공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사장되고 말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비행시뮬레이션의 궁극적인 평가기준은 그래픽 여부가 아니라 완성도에 있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래픽도 완성도에 일조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느정도 수준만 충족되면 그 이상은 단순한 시야만족일 뿐인데 비행시뮬레이션의 수명은 비교적 길고 그 전에 더좋은 그래픽이 선보여질 여지는 얼마든지 있기 때문에 그래픽에 주로 의존한 흥행작들은 그 수명이 더 좋은 그래픽이 나오기 전까지만으로 제한되곤 하는 것이다.

 F-15 III와 같은 회사의 제품이고 매우 비슷한(즉 기종만 다른 셈인) F-14 플릿 디펜더는 이당시의 성공한 제품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F-15 III에서 이미 전자장비의 묘사에 대한 노하우는 쌓여진 것처럼 보이는데, MPS는 이점을 F-14 라는 기종에서 다시 최대한 살렸다. F-14는 주로 레이다를 통해 적을 요격하는 함대방공 요격기인 것이다.

 F-14 플릿 디펜더는 F-15 III에서 지적되었던 람보미션에서 벗어나 아군 편대원들을 효과적으로 명령하고 협조할 수 있는 명령어들을 추가하였고 결국 F-14 플릿디펜더는 AI가 다소 비현실적인 행동을 보인다는 지적을 받았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완성도 높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팰콘 3.0 이후에는 실로 극단적인 완성도를 추구하는 "하드코어(극단적인 형태를 원하는 소수 매니아의 취향을 충족시킨다는 뜻임) 시뮬레이션"만이 살아남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한가지 필자가 의아하게 생각하는 점은 어째서 이미 전작인 F-15 III에서 삽입된 모뎀플레이 기능을 삽입하지 않았는가이다.


F-14 플릿 디펜더 (박스 아트)

 또하나 빼놓을 수 없는 MPS의 후속작품은 다름아닌 1942 PAW이다. 그래픽적인 완성도는 전작들과 흡사하나 2차대전의 태평양상에서의 프로펠러기를 다루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제트기가 아닌 프로펠러기이므로 레이다 조작할 일은 없지만 속도가 바뀜에 따라 트림조작을 해주어야 하는 등 플라이트 시뮬레이터와 비견될만한 비행모델은 더 이상 사실적인 비행모델이 민간항공 시뮬레이션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선언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전까지는 민간항공 시뮬레이션을 즐기는 사람들은 전투비행 시뮬레이션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 비행모델의 간략화나 항법장비의 묘사부족 등의 이유로 상당히 멸시하는 태도를 취해왔던게 사실이다. 옛날의 에이스 시리즈는 박진감은 넘쳤지만 비행모델은 상당한 문제점이 제기되었던 바 있지만, 이후의 전투비행시뮬레이션들은 대부분 비행모델에 있어서도 뛰어난 완성도를 보이기 시작한다. 이는 물론 전투상황 묘사와 비행모델연산 동시작업을 위한 시스템의 한계가 점차 극복되어가면서 가능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1942 PAW에서는 조종사 경력모드, 캠페인모드등 다양한 종류의 메뉴를 지원하며 그중에서도 캠페인 모드에서는 한 작전지역에서의 수개 함대를 직접 지휘하고 항공기운용을 결정하는 전략게임적인 면까지 포함한 매우 참신한 시도를 하기도 했다. 사실 이것은 MPS의 해전 시뮬레이션인 Task force 1942 (국내출시명 무적함대)에서 이미 시도되었던 것이며, 이중 전략 인터페이스 부분은 TF1942의 것을 거의 그대로 얹었다.
 매우 호평 받았고 매니아층도 많이 얻은 잘된 작품이나, 아쉽게도 메뉴에서 지원한 모뎀플레이 기능이 매우 불안정해서 접속이 거의 불가능한 단점이 있었다. 이것만 제대로 되었더라도 훨씬 더 많은 매니아를 오래 붙잡을 수 있었을텐데 말이다.


1942 Pasific Air War(박스아트) 

철기 시대

 철기시대의 키워드는 뭐니뭐니 해도 모뎀을 포함한 "네트워크"이다. 철이 발견된 것은 오래 전이지만 산업혁명으로 인하여 비로소 철제품들이 전세계를 뒤덮게 되었듯이, 네트워크라는 기능의 실용화가 비행시뮬레이션계에 있어서 산업혁명과도 같이 작용한 것이다. 이러한 네트워크 기능 향상에 있어서 PC가 도스체제에서 윈도우즈 체제로 바뀐 것이 상당한 역할을 했다. 도스에서는 직접 전화로 오픈된 게임에 접속하는 것이 아니라면 모뎀연결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고 인터넷 접속은 그야말로 난해한 문제였다. 그러나 윈도우즈 운영체계가 보편화되면서 전화접속 및 인터넷 접속이 보다 쉬워졌고 그결과가 시뮬레이션의 네트워크 기능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F-14 플릿디펜더, 1942 PAW등이 많은 호평은 받았지만 "나혼자"라는 한계를 보였다면, 모뎀플레이 기능이 본격적으로 쓰일 수 있게 된 후부터는 다소 비행모델이나 완성도에 한계가 있는 시뮬레이션이라 할지라도 모뎀플레이 기능만 잘되면 모뎀을 이용해 서로 대전하는 도구로서 훌륭히 이용되곤 했다. 이 때문에 개인차는 있지만 전반적인 흥행작 추세는 비행모델과 레이더 조작이라는 전통적 개념이 그 기준에서 한발 물러나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대략 이때쯤(즉 90년대 중반을 넘어가면서) 640*480 그래픽이 본격적으로 이용되기 시작한 점도 빼놓을 수 없지만 그래픽은 위에 말했다시피 완성도 평가에 부분적인 것이므로 중요한 기술적 변동사항에 속하지는 않는다고 본다. 다만 전반적인 표현효과의 상승을 가져온 것은 사실이다.

 그래픽과 모뎀기능 양자의 힘을 충분히 보여준 대표적인 제품은 EA사의 척예거의 공중전의 아들격인 USNF 시리즈이다. 초기에는 고해상도 그래픽과 박력있는 사운드로 매우 많은 호응을 얻었으나 그래픽은 그보다 좋은 것을 한두번만 보면 금새 그 의미가 퇴색되므로 그 호응 자체가 오래 갈수 없지만 뒤따르는 후속작들과 강력한 네트워크 플레이 기능으로 인하여 꾸준한 팬층을 확보할 수 있었다. 비행모델에 한계가 있고 레이다가 간략화 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러한 성공은 특별한 것이다. 나중에는 엔진의 대폭적인 개선 없이 이름만 바꿔서 울궈먹는게 아니냐는 비판도 일었지만 파이터 앤솔로지라는 최종 울궈먹기판이 거센 항의에 직면할때조차도 그 제품은 전 세계에서 날개돋친 듯이 팔려나갔다.


USNF 97

 또하나 DID라는 회사의 꾸준한 제품 출시 결과 TFX 계열을 잇는 EF2000과 추가팩이 결정적인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이역시 완성도 면에서는 비행모델의 단순화, 무한대에 가까운 기총숫자등등 많은 비판이 있었지만 쉬운 조작과 네트워크 기능, 고해상도 그래픽으로 무장하고 마치 국내 비행시뮬레이션 매니아 공식 넷플품목이라도 되는 듯이 날개돋친 듯이 팔려나갔다. (지금도 팔려나간다) 이 EF2000은 모 통신사 주최 대회와 제1회 공군주최 비행시뮬레이션 대회의 주기종으로 선정되는 영광을 누렸다.


EF2000


F-22 ADF의 확장판인 Total Air War

 같은 회사의 후속작인 F-22 ADF도 전작과 거의 비슷한 내용의 답습에도 불구하고 네트워크 지원으로 역시 제2회 공군주최 시뮬레이션 대회 기종으로 채택되었다.

 네트워크 기능은 이렇게 강력한 것이다. 이점은 스타크래프트가 PC방 업계를 살렸다고 하는데서도 충분히 알 수 있으니, 그 영향력이란 비행시뮬레이션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사실은, 스타크래프트가 게임방에서 활발하게 플레이되기 훨씬 전부터 비행시뮬레이션 매니아들 사이에서 모뎀플레이는 물론 PPP를 이용한 다중 네트워크 플레이도 이미 실용화되어 있었다. 단지 게임방 사정이나 비행시뮬레이션의 특성상 비행시뮬레이션을 게임방에서 즐기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비행시뮬레이션이 게임방을 "선점" 하지는 못했을 뿐이다.

 비행시뮬레이션 네트워크 기능은 이러한 전통적인 개인간 연결방식이나 공개 및 유료서버 이외에도 또하나의 개념을 제공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데, 바로 통합전장 계획이다. 통합전장 계획은 예전부터 DID가 공개적으로 언급한 시뮬레이션 네트워크기능의 일대 혁명적 발전이라 할 수 있는 개념인데, 이미 동일 엔진을 이용한 몇 개의 독자적인 패키지상품을 하나의 네트워크에 올릴 수 있는 기능은 종종 선보여왔으나 DID사의 계획은 그러한 기능을 공군무기는 물론 전차등의 지상무기까지로 확대하여 전장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무기들을 하나의 엔진에 통합하여 네트워크로 묶을수 있게 한다는 그야말로 획기적인 것이다. 아직까지는 구체적인 결과물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머지않은 장래에 이러한 통합전장개념은 네트워크 플레이의 표준이 될 가능성이 있으며 팰콘4.0에서도 동일 엔진을 이용한 추가 패키지의 출시를 계획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Posted by 롤링다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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