뾰족 뽀족 솟은 산봉우리 사이로 위성사진 캡쳐된 논밭을 지나 텍스쳐 입혀진 적기에게 미사일 공격을 가한다. 3D 엔진소리와 파괴소리, 교신음성이 귓전을 때린다. 이 모든 것은 불과 17인치(혹은 19인치)상에서 벌어며, 양 손은 HOTAS System 위에 얹혀져 있고 두 발은 러더를 차기에 여념이 없다. 손과 발, 그리고 눈과 머리가 모두 바쁘다. 다른 게임들과는 달리, 비행시뮬레이션은 PC상의 3D세상에서 일종의 버츄얼 리얼리티를 제공해준다. 아직 가정용으로서는 비싼 감은 없지 않지만, 심지어는 게임영업장에 있는 10분당 수천원 하는 가상 현실 기구에서나 볼법한 버츄얼 헬멧도 많은 비행시뮬레이션에 지원된다. 본격적인 3D게임으로서는 비행시뮬레이션 말고 3D액션게임들이 있지만, 게임으로서의 재미를 배제한 완성도나 현실세계의 재현으로만 따진다면 비행시뮬레이션은 가히 가상현실 그자체인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PC가 구현하고 있는 일반적인 전투비행시뮬레이션의 모습이다. 그리고 이러한 비행시뮬레이션을 하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최고의 게이머라고 자부한다. 아니, 그중에서도 열렬한 매니아들은 스스로를 게이머가 아닌 "사이버 파일롯"이라 부른다. 실제로, 비행시뮬레이션은 PC의 최고 사양을 요구하고 그어떤 오락보다도 고도의 장비와 해박한 지식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점은 비행시뮬레이션 매니아들이 스스로를 일반 게이머와 별개의 존재로 인식하게 하는 근본적인 이유중 하나이다. 비행시뮬레이션은 한마디로 컴퓨터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하는 멀티미디어의 총아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비유적으로 쓰는 표현중 하나가, 비행시뮬레이션을 돌릴때마다 "주인님 오늘도 제 성능을 최대한 발휘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컴퓨터가 비행시뮬레이션 매니아에게 감사한다는 것이다. 이의 진위를 확인할 길은 없지만, 컴퓨터에게 생각이 있다면 그럼직도 하다.

 이렇게 시스템에 의해서 매우 많은 영향을 받는 비행시뮬레이션의 역사가 컴퓨터의 발전과 그 궤를 같이 하고 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불과 3년전의 시스템이 제공했던 비행시뮬레이션 환경은 지금의 기준으로는 영화 쥬라기 공원앞의 우뢰매와도 비슷하게 치부되곤 한다. 이제 새로운 밀레니엄에 어떤 시스템이 얼마나 사실적인 버츄얼 리얼리티를 제공할 것인지, 단지 소비자이고 기술의 수혜자일 뿐인 우리는 예측할 수 없다. 팰콘4.0이 불과 6개월 전에 나왔을때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도대체 이런 고사양을 요하는 것을 누구네집 컴퓨터에서 돌리란 말인가라며 흥분했었다. 펜티엄 III와 부두3가 나오지도 않았거니와 나온다고 해도 재벌아들이나 살 수 있는 고가품으로 인식되던 때였다. 그러나 고작 수 개월만에 부두3는 대중화되었고 펜티엄III를 쓰는 사람도 적지 않다. 요즘 개발되는 시스템은 현재의 그래픽을 한낱 이발소에 걸린 유치한 풍경화나 혹은 원시시대 벽화정도로 치부하게끔 하기에도 충분해 보인다. 이렇게 불과 수개월의 미래를 예측하지 못하는 바에야 소비자는 그냥 굿이나 보면서 떡이나 먹는게 편할 것 같다. 대신, 필자는 어디로 갈지도 알 수 없는 미래로의 여행대신 과거로의 여행을 해보기로 하겠다. 저옛날 유명한 미국 TV 미니시리즈 "뿌리"에서 미국 흑인 소설가가 아프리카에서 잡혀온 자신의 먼 조상을 찾아 역사를 거슬러올라가는 마음가짐으로 말이다.

선사시대

 비행시뮬레이션의 과거를 논하는데 있어서 그 뿌리를 어디까지 거슬러올라갈 것인가? 사막 한가운데에서 화석조각 하나로 지구의 기원을 추론하듯이 말해보자면, 그 뿌리는 컴퓨터의 태동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컴퓨터의 태동이라니? 컴퓨터는 2차대전때 암호해독을 위해 만든게 아니었던가? 맞다. 그렇지만 그것은 그냥 암호해독기라고 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미 국방부는 2차 대전당시 조종사 양성을 위해서 항공기 시뮬레이터를 운용했다. 그당시 시뮬레이터는 기계적인 단순한 것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의 장비가 하나의 기종만을 훈련시킬 수 있었고, 여러 대의 항공기 훈련을 시키기 위해서는 여러종류의 시뮬레이터를 장비해야 했으므로, 당시의 똘똘한 박사들에게 하나의 시뮬레이터로 여러 가지의 기종의 항공기를 훈련할 수 있는 장치를 개발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리하여 애드벅이니 애니악이니 하는 초창기 컴퓨터 프로젝트가 탄생되기 시작하였다. 물론 매우 조잡한 당시의 컴퓨터이지만 크기로는 명실상부한 슈퍼컴퓨터이다.

 그런데 대체 이런 얘기가 왜 중요한가? 생각해보라. 컴퓨터가 나오고 비행시뮬레이션이 생긴게 아니라, 비행시뮬레이션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컴퓨터라니, 컴퓨터가 주인님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어찌 당연하지 않겠는가! 통상 전략 게임의 시초는 실제 군사용 워게임을 군인들이 집으로 가져가서 취미로 즐기기 시작하면서라고 알려져있다. PC 비행시뮬레이션역시 그 태생이 실제 시뮬레이터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실제 비행시뮬레이터를 집으로 가져가 즐기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성능의 향상에 의해 컴퓨터가 다른 가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발전되는 동안에도, 원래의 목적이었던 비행시뮬레이터의 용도로 훌륭하게 쓰였다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이다.

 PC환경이라는 것은 전체 컴퓨터의 역사로 보면 비교적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대중화 되기 시작한 것이 대략 80년대 초반부터가 아닐까 싶다. 우리는 컴퓨터가 회사나 연구소에서 가정집 안방으로 들어오는 순간을 추측해볼 수 있다. 회사나 연구소에서 비행시뮬레이터가 중요한 컴퓨터의 용도중 하나였다면, 그쪽 분야에 관심 있는 사람이 가정용 PC환경에서 돌아갈 수 있는 비행시뮬레이션을 만들고자 노력했을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추론 가능하다. 물론 그시절에 가능했던 완성도 여부는 차치하고 말이다. 비행시뮬레이션의 화석을 주우러 다니던 필자는 그러한 고대 화석의 파편들 비슷한 것들을 어느정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러한 비행시뮬레이션의 고대화석이 말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게임에서의 고대 화석은 필자가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에, 즉 70년대 중반에 국내에 대중화되기 시작한, 막대기와 사각형 공이 움직이는 축구, 탁구 게임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비행 슈팅게임의 화석은 아마도 인베이더일 것이다. 인베이더는 진화해서 겔라그가 되고 겔라그가 진화해서 라이덴이 되고, 라이덴이 진화해서 3차원 비행슈팅게임인 애프터버너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오늘날 외형적인 모습이 3차원 슈팅게임과 비행시뮬레이션이 매우 흡사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혼동할지라도, 비행시뮬레이션의 계보는 이러한 게임의 진화계보와 엄연히 별도로 독자적으로 진화해왔다는 것을 비행시뮬레이션의 화석들은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혹자는 이러한 생각에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비행시뮬레이션은 게임이 아니다! 물론 인생은 하나의 게임이다라는 식으로 말한다면 비행시뮬레이션도 게임이다. 그렇지만, 흔한 개념으로서 킬링타임용의 컴퓨터 오락을 게임이라고 말한다면, 비행시뮬레이션은 그 테두리에서 적어도 한쪽 발은 벗어나있다.   

석기시대           

 저 먼 각종 자료들에서, 필자는 F-15 I이라는 이름 하나를 발견했다. 그것은 이른바 비행시뮬레이션의 가장 오래된 화석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CGA 그래픽을 사용하는 1986년작인 이 F-15 I은 MPS의 유명한 디자이너 시드 마이어의 작품이며, 85년도에 8비트 애플용으로 나왔다가 큰 성공에 힘입어 PC용으로 이식되었다. 놀랍게도(당시로서는 그리 놀라운 것도 아니겠지만) 이것은 한 개의 EXE화일로 만들어져 있다. 그 내용이야 어떻든 F-15 I은 F-15 II, F-15 III로 이어지는 계보의 시조로서, 비행시뮬레이션의 뿌리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그 계보를 만들어낸 Microprose사가 오늘날 비행시뮬레이션계에서 가장 인지도와 사실성 뛰어난 비행시뮬레이션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은 어찌보면 우연이 아닐런지도 모른다.


F-15 I

 또다른 희귀한 화석으로, 지금은 스타워즈시리즈에 전념하고 있는 루카스필름의 최초 비행시뮬레이션인 battle hawk 1942이 있다. 이는 1942년경의 태평양 전투를 다룬 것이다. 이 제품은 1988년작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Battlehawk 1942

 당시 점차 대중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비행시뮬레이션이라고 한다면 대표적인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F-19나 팰콘1.0을 꼽는다. 지금 기준으로 돌이켜본다면 그것들이 정말 제대로 된 시뮬레이션이며 하다못해 게임성이라도 가지고 있었는가 의심스러운 것이 사실이지만, 당시로서는 나름대로의 사실성을 추구하며 비행시뮬레이션이라는 것이 어째서 게임과 다르다 하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었던 작품들이라 생각한다. 지금은 비행시뮬레이션을 비교적 쉽게 접할 수 있어서 비행시뮬레이션을 그저 그래픽 멋진 3차원 슈팅게임쯤으로 여기는 사람이 많지만(이 경우 플레이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한다), 그때당시에만 해도 PC 비행시뮬레이션이라는 것을 접한다는 자체가 비행이나 군사쪽에 대한 특별한 애착이 있지 않으면 안되었다. 아마도 이러한 점이 경력이 오랜 사이버파일롯들일수록 비행시뮬레이션에 대한 남다른 애착을 갖고 있는 이유가 될지도 모른다. 그들은 애당초 그만큼 비행시뮬레이션을 더욱 진지하게 접할 자세로 비행에 임해왔던 것이다.

 
F-19와 박스 아트

 F-15 II나 F-19, F-117등은 비슷한 계보를 가진 MPS의 작품으로서 망사로된 스모크와 삼각형 색종이 조각 파편등은 지금 생각해도 다소의 유머러스함을 느낄 정도이지만, 이 전형적인 비행시뮬레이션의 트레이드 마크는 폴리곤 시절이 끝나고 텍스쳐 맵핑이 실용화될 때 까지도 무슨 이유인지 계속 몇 개 회사에서 사용하고 있었다.


F-117 (로고)

 약간은 비행시뮬레이션계에서 이단아격인 루카스 필름의 초창기 비행시뮬레이션 시리즈를 또다시 언급해야 할 것 같다.

 루카스 아츠의 최초작품인 Battle hawk 1942는 후속작인 Battle of Britain(국내 출시명 최상의 시간)으로 이어졌다. 이 그래픽은 독특하다고 할 수 있다. 다른 많은 시뮬레이션들이 초창기부터 매우 초보적인 수준이나마 3차원 형태의 묘사를 하려한데 반하여, 전작에서 이어지는 최상의 시간은 비행물체를 순전히 2D 조각으로 그려놓았다. 즉 일정 각도에서 보는 항공기의 모습들을 일일이 따로 그려서 그 각도에 맞는 그림조각을 그 자리에 붙여주었던 것이다. 폴리곤 없는 가변 2D텍스쳐라고나 할까. 이런 방식은 제한된 여건하에서는 항공기 디테일을 살릴 수 있기 때문에 장점도 있지만 기체 형태 자체의 왜곡이 너무 심하여 다른 제작사들에서는 거의 채택하지 않은 방식이다. 그럼에두 불구하고 무슨 심뽀인지 루카스필름은 이 방식을 3째 작품인 Secret weapons of Luftwaffe(국내 출시명 나찌공군의 비밀무기)에도 그대로 적용하였다. 물론 이것이 이유는 아니겠지만, SWOTL로 불리우는 나찌공군의 비밀무기는 국내판의 충실한 스프링 매뉴얼과 함께 국내외에서 비교적 좋은 호응을 얻었는데 아마도 초창기로서는 획기적인 독일 비밀무기등을 묘사한 것이 상업적인 관심을 끄는데 성공했던 게 아닌가 생각된다. SWOTL은 내용면에서는 자기 부대의 조종사 인적관리를 아기자기하게 할 수 있어서 그점에 대한 평판이 특히 좋았다고 볼 수 있는데, 즉 부대장인 플레이어가 특정한 AI의 이름을 지어주고 전투에 참가시키면 그 AI 조종사가 경력과 전과에 따라서 그 비행능력이 높아진다는 당시로서는 매우 참신한 발상이었다. 이 방식은 나중에 스타워즈 시리즈에 거의 그대로 적용되었다. 그리고 당시로서는 지금의 그것과는 약간 다른 이유와 기술력에서 출발했겠지만, 현재의 3D콕핏 개념과 흡사한 회전시야를 가지고 있었다. 비록 이 시야방법은 순전히 수동(手動)적인 것이고 기체의 실루엣이 나타나지 않는등의 이유로 실용적인 효과는 제한적이었지만, 개념 자체는 당시 기술력 한계를 한발 앞서나갈 정도로 새로운 것이었다. 어찌된 영문인지는 잘 알수 없으나, SWOTL의 나름대로의 성공을 뒤로하고 루카스 필름은 더 이상 실제를 바탕으로 한 비행시뮬레이션 제작을 중단하고 SF인 스타워즈 시리즈의 제작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어찌보면 조지 루카스의 회사니까 당연한 귀결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는 스타워즈 시리즈의 게임으로서의 완성도나 영화를 등에 업은 흥행은 가히 지구를 뒤흔들 정도라고 할 수 있다. 다만 SF물은 전통적인 비행시뮬레이션의 개념과는 다소 거리가 있으므로 이 자리에서 자세한 언급은 피하겠다. 루카스 필름이 계속 실제를 바탕으로 한 비행시뮬레이션을 만들었더라도 스타워즈 시리즈의 퀄리티로 볼때는 멀티미디어적으로 상당히 앞서나가는 제품을 출시했을 가능성이 있어 보이지만 나름대로 돈 잘벌고 상업적으로 성공했으니 그들로서는 잘된 결정을 한 셈이다.     


최상의 시간


나찌공군의 비밀 무기(박스 아트)

 참고로 이때 당시의 비행시뮬레이션들은 지금은 거의 공개로 풀렸기 때문에 약간의 노력만 있으면 합법적으로 공짜로 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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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롤링다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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