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동기 시대

 286 컴퓨터와 VGA 그래픽은 비행시뮬레이션을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 다른 장르의 게임도 마찬가지이기는 하지만, 특히나 비행시뮬레이션은 연산에만 많은 시스템의 능력이 소비되고 비행기가 3차원상에서 움직임으로 인하여 그 공간을 충실하게 묘사해주느냐에 역시 많은 비중이 두어지는데, VGA 그래픽이 되어서야 이것이 비행기이고 저것이 자동차이고 하는 것을 그런대로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비로소 어느정도 사실감 있는 그래픽 시현이 가능해졌던 것이다. 비록 극단순화된 상자곽인 폴리곤 그래픽이 주종이긴 하였지만 말이다.

 개인적으로 필자가 가장 처음 접했던 것이 다이나믹스의 A-10 1.5인데, 당시에 매우 획기적인 그래픽의 발전으로 알려졌으며 실사를 캡춰한 브리핑 화면등은 가히 감동의 도가니였다. A-10으로 지상공격을 하다 지겨워져 A-10으로 R/C 비행기에서 주워들은 각종 공중기동을 시도해보거나 미그기와 공중전을 벌이겠다고 난리 부스르를 추기도 했었다.


Dynamix의 A-10 1.5

아마도 VGA의 덕을 톡톡히 본 것은 이 A-10을 제작한 다이나믹스사가 아닐까 싶다. 다이나믹스사는 A-10 이외에도 레드바론(국내 출시명 "하늘의 영웅들"), 태평양의 에이스등 깔끔하면서도 주요 임무를 수행하는데 매우 효과적인 그래픽, 흥미진진한 몰입성등을 가진 연작의 흥행에 성공하였던 것이다.

 레드바론은 말그대로 1차대전 당시의 하늘의 기사들간의 전쟁을 묘사한 수작으로서 두꺼운 정품 매뉴얼에 힘입은 경력비행의 감정이입이 대단히 잘된 작품이었다. 그래픽 또한 제한된 여건에서 매우 효과적인 묘사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작품은 나중에 레드바론 II로까지 이어졌다. 여담이지만, 비행기에 개인 무늬를 그려넣고 경력 비행 중 적국의 조종사들끼리 결투 신청 쪽지를 보내는 것까지 묘사한 이 작품이 그 대단한 성공에 힘입어 이후의 비행시뮬레이션 매니아들의 공중전에 대한 약간은 지나치게 낭만적인 감정을 낳았던게 아닌가 싶다. 사실 공중전을 스포츠나 기사들간의 마상창시합과 비교하면, 아돌프 갈란트의 인터뷰를 비롯해 경력있는 전현직 조종사들은 펄쩍 뛴다고 한다. 결국은 공중전이라는 것도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적을 죽이고 내가 사는 전쟁일 뿐이라는 것이다. 다만 낙하산을 쏘지 않는다거나 기타 그와 유사한 조금은 낭만적인 일화나 반드시 지켜진 것은 아닌 불문율등은 존재했었다고 한다.


레드 바론 (로고)

레드바론 II 3D

 태평양의 에이스는 2차대전 태평양전선을 배경으로 한 것으로서, 항공모함 전투를 경험할 수 있게 해주었다. 영화 도라도라도라에 익숙해져있던 국내의 많은 사람들에게 태평양의 에이스는 친숙하게 받아들여졌고 세계적으로도 흥행에 성공했다.     


태평양의 에이스

 또한 유럽의 에이스는 수많은 세계의 프로그래머들이 패치격인 각종 유틸리티들을 다수 만들어내어 에이스 시리즈에 대한 열렬한 애착과 관심을 증명해보이기도 했다. 에이스 시리즈의 수명은 각각 꽤 길었던 편이다. 외국 어떤 비행시뮬레이션 매니아의 홈페이지에는 에이스 시리즈에 "내가 커오면서 삶의 많은 시간을 여기에 투자했다" 라고 자랑스럽게 주석을 달고 있기도 한데, 필자역시 마찬가지로서 두세 번의 방학을 전혀 피서나 외출 없이 아침부터 새벽까지 에이스 시리즈에만 몰두했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유럽의 에이스

 이 시절의 다이나믹스 흥행연작들은 나중에 에이스 모음집으로 CD에 담아질 만큼 그 가치를 충분히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매우 방대한 분량의 역사적 배경 설명 및 전술이 포함된 매뉴얼(유럽의 에이스를 제외하면 국내출시판에서 완역되었음)등은 비행시뮬레이션의 리얼리티를 한층 배가시켜주는 데 일조를 했고 오늘날 매뉴얼의 충실성 여부에 따라 구매의사에 변화가 있다고 할 정도로 매뉴얼은 비행시뮬레이션에 있어서 빠질 수 없는 부분으로 인식되고 있다. 실제로 국내의 모 수입사에서 비행시뮬레이션에는 필수불가결한 매뉴얼의 배경 설명 부분을 임의로 삭제하여 비행시뮬레이션 매니아들에게 악덕기업으로 비난받기 전까지, 어떤 사람들은 매뉴얼 때문에 비행시뮬레이션을 소장품으로 구입하기도 하였고(이건 요즘도 마찬가지다.) 심지어는 박스의 크기와 무게를 보고 무조건 구입하는 일도 있었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낭만적이었던 시절이 아닌가 싶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이때 당시의 EA의 제품으로 척 예거의 공중전이 있다. EA사는 척예거의 공중전 발매 당시 이미 LHX등 비행시뮬레이션 계통에서 나름대로 위치를 가지고 있던 회사인데, 척예거의 공중전은 이러한 입지를 확고히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척예거의 공중전은 일반적으로 말한다면 태평양의 에이스 정도의 제품이고 단지 2차대전, 한국전, 월남전의 시대별 항공기가 등장하고 뒤섞여 전투를 벌여볼 수 있다는 것이 특징인 점을 제외하면 일견 그저 평범해보이는 제품이지만, 실상 그 존재가치는 뛰어나다. 완성도가 중요시되는 비행시뮬레이션 중에서도 재미나 상업적 성공이 아닌 존재가치로 평가되는 비행시뮬레이션은 사실 손꼽을 정도인데, 척예거의 공중전은 그러한 손꼽히는 명작들중 하나이다. 어떤 이의 말을 빌면 척예거의 공중전은 비행시뮬레이션에 입문하는 사람들에게 바로 이런 것이 비행시뮬레이션이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적당한 것중 하나이다. 즉 그자체 비행시뮬레이션의 개념에 충실했을 뿐만 아니라, 캠페인 모드가 없이 단일임무와 간단한 미션제작기만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3차원상의 전투상황을 이해하는데 매우 효과적이었다. 이 제품의 가치는 게임이라는 것 자체를 그다지 적극적으로 소개 하지 않던 90년대 초반의 국내 언론에서조차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 한번쯤 해볼만한 잘된 작품이라고 소개되었다는데서도 그 진가를 알 수 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불과 며칠전에 있었던 컴뱃심의 설문조사에서 주로 하는 시뮬레이션의 목록 상위에 바로 이 척예거의 공중전이 랭크되었다는 사실이다. 외국에서는 시뮬레이션의 생명력이 우리나라처럼 유행에 좌우되는 면이 더 적다고 할수도 있지만 그점을 감안하더라도 이는 분명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참고로 아래 말씀드릴 팰콘3.0도 나온지 5년이 훨씬 넘는 시점에서 동일한 설문조사에 상위를 차지했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수백년이 지나도 명작이듯이 명품은 얼마가 지나도 명품인 것이다. 바로 이런 시대와 유행에 구애받지 않는 명작들을 우리는 고전이라고 부른다. 훌륭한 고전인 척예거의 공중전은 이후 작품인 USNF 시리즈에 기본골격이 그대로 유지되어 전해졌다.       


척 예거의 공중전

 비록 286시스템에 최적화되어 나온 것은 아니지만, 저 유명한 스펙트럼 홀로바이트 사의 팰콘3.0을 빼놓을 수가 없다. 팰콘3.0은 농업혁명과 마찬가지로 가히 혁명적인 제품이다. 부분적인 면에서 그동안 팰콘3.0과 비슷한 재미나 난이도를 주는 것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팰콘3.0은 당대의 기술을 모두 집약하고 앞으로의 비행시뮬레이션의 나아갈 길을 제시해준 작품이었으며, 이후 수 년간 최고의 비행시뮬레이션 자리 유지는 물론 90년대 중후반까지도 그를 즐기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한 완성도를 위해서 286으로는 무리였는지, 286이 보편적인 상황에서 386에 연산용 코프로세서(이때 이정도 사양이면 재벌 아들이나 가질 수 있는 것이었음)를 탑재해야만 최고의 비행 사실성과 그래픽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었으니 팰콘3.0이 얼마나 앞을 내다보고 만들어진 것인지 짐작할만 하다. 팰콘3.0은 비행시뮬레이션을 단지 대충 조작법 익혀서 적기 죽이고 다니는 것으로부터 실제 기체조작과 매우 흡사한 조작방법과 전술을 이해하고 전쟁속에서의 자신의 위치와 임무를 파악해야 하는 전문적인 취미로 바꾸었다. 이때부터 두꺼운 매뉴얼은 단지 감정이입을 위한 역사책이 아니라 시뮬레이션을 조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실용적 이유에 의해서 역시 두꺼워야만 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다. 모뎀란게 대체 뭣이여? 라고 할만한 시절, 인터넷은 커녕 국내 업체의 VT기반 BBS도 일부의 매니아적 취미쯤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을 시절에, 팰콘 3.0은 이미 모뎀 및 네트워크 플레이 메뉴를 지원하고 있었고 그것도 단순한 대결모드만이 아닌 캠페인에 동참하는 기능까지를 포함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당시에 2400모뎀으로 팰콘3.0의 모뎀플레이를 즐긴 사람들이 아마도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네트워크 플레이를 한 사람이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팰콘 3.0

 팰콘3.0의 새로운 개념은 또있다. 동일한 엔진을 사용한 호넷과 미그29를 연달아 출시함으로써 각각의 기종들을 동일한 네트워크상에 올려놓고 비행을 할 수 있게 한 것이다. 한 시뮬레이션에서 여러 대의 항공기를 표현한 예는 전부터 있었지만, 그 경우 각각의 항공기 묘사의 디테일함은 다소 생략될 수밖에 없다. 물론 팰콘 패밀리인 호넷이나 미그29도 지금 기준으로 보면 디테일한 면이 생략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감을 주려 한 흔적이 보이고 독자적인 패키지들을 한 네트워크에 올릴 수 있다는 발상 자체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요즘에야 노바로직이나 엑스윙 시리즈등을 비롯 이런 식의 묶음이 심심치 않게 이루어지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이 팰콘패밀리에는 원래 A-10이나 다른 많은 장비들을 포함시켜 말그대로 통합전장을 실현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이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PC 시스템이 너무나 빨리 발전해버리는 바람에 그 계획히 가시화 되기도 전에 팰콘엔진이 시스템에 비해 낙후된 것이 되어 더 이상의 패밀리 출시는 않고 팰콘4.0의 제작으로 들어가버렸다. 이 팰콘 패밀리 3형제는 후에 미공군 F-16 교관의 70분짜리 공중전 강연 동영상 및 강의교재를 포함하여 팰콘골드라는 CD버젼으로 나왔는데 이 소장품(게임이라기보다는)은 PC 비행시뮬레이션 역사상 가장 가치있는 소장품중의 하나이다.   

 이 팰콘3.0의 수명이 얼마나 길었는가 하면, 필자가 팰콘3.0을 사고난후 군대에 갔다 와서 모 통신동호회의 팰콘3.0 네트워크 플레이 대회(그때당시는 게임방이라는 것도 없었고 멀티방이라는 게임방의 전단계 개념이 서울시내 몇군데에서 어렵사리 운영해나가던 시절이라 대회도 어떤 회사 사무실에서 했음)에 참가했을 정도였다. 그것이 끝이 아니다. 팰콘 4.0이 나온 후에도 팰콘4.0을 돌릴만한 시스템이 되지 않는 사람은 팰콘3.0을 지금도 구하고 인스톨해서 플레이한다는 소문이 심심치 않게 들린다. 팰콘3.0의 생명력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인 것이다.

 팰콘 3.0의 가장 중요한 혁명적인 아이디어로서 패드락 모드의 도입을 들 수 있다. 그 이전에는 고장된 각도를 보여주는 고정조망만이 조종석에서의 유일한 외부 관찰방법이었으나, 이는 시야각도 왜곡의 소지도 있고 전투중에는 전방 계기판보다는 적기에 시야를 고정시키고 있어야 한다는 점에 착안하여 모니터 중앙에 적기를 고정시키고 조종석이 움직이게 만든 패드락 모드는 비행시뮬레이션의 기술적 발전에 있어서 가장 획기적인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류가 천동설에서 지동설을 받아들이게 된 만큼의 시점의 변화라고나 할까. 팰콘3.0에서의 패드락 모드는 약간의 문제점이 지적되긴 했지만 그이후 특수한 혹은 고집적인 몇몇 경우를 제외한 거의 모든 비행시뮬레이션들이 패드락 모드를 도입할 정도로 패드락 모드는 혁명적인 것이었다. 지금도 패드락 모드에 대한 찬반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순전히 개인적인 취향일 뿐이고 이제는 더 나아가 아예 3D 화면상에서 조종석 계기를 읽고 실제 조종사와 같은 방식으로 시야를 움직일 수 있는 3D조종석이라는 개념으로 발전되고 있다. 이 팰콘3.0은 완성도 뿐만 아니라 대중적으로도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에 이후 다른 모든 비행시뮬레이션은 이 팰콘3.0을 대상으로 벤치마킹 되면서 제작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 비행시뮬레이션계로서는 대단한 다행이다. 즉 MPS는 그들이 원하는 바대로 비행시뮬레이션의 앞날을 제시하는데 실제로 성공했다. 어쩌면 팰콘3.0이 실패했다면 최악의 경우 하드코어 비행시뮬레이션이라는 것이 상업적 흥행소지가 없는 것으로 업체들에게 인식되고 이후에는 마치 워게임이 전략게임이라는 단순파괴게임으로 전락했듯이 비행시뮬레이션이라는 것이 오락적인 면만 강조된 실질적인 3차원 슈팅게임화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팰콘3.0의 성공 이후에도 아케이드성을 강조한 몇몇 회사의 이른바 비행시뮬레이션들이 상업적으로는 흥행을 하고 있는 현재의 처지를 감안한다면 더더욱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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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롤링다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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