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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11.17 [소개] 몽골(Mongolia) (1)
(자료출처 ; 몽골문화원, 몽골대사관, http://www.shoestring.co.kr/destinations/asia/mongols.htm 등등)

몽골(Mongolia)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항상 징기스칸(Genghis Khan)장군, 고비사막을 떠도는 낙타, 대초원을 질주하는 야생 말과 같이 야성적이며 이국적인 광경이 떠오른다. 오늘날에도 몽골은 지구의 끝자락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수도인 올란바토르(Ulaan Baatar)외곽에서는 다른 나라에 온 것이 아니라 다른 세기에 발을 들여 논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게 된다. 이곳은 아시아에서 최고의 모험이 남아있는 곳이다. 몽골이 독립국가로 남아있는 것은 순식간에 일어난 기적이 아니다. 한때 방대한 유라시아(Eurasian)대초원의 지배자였던 몽골은 여러 세기 동안에 처음으로 중국이나 러시아의 식민속국이 아닌 독립국가로서 남아있는 것이다. 한 세기 전만 하더라도 그들의 조상으로 여겨지는 몽골인 들이 한 명도 남아있지 않아서 유목민족은 완전히 사라지는 위기를 맞기도 하였다. 이제 이 나라는 법령과 다수정당 투표방식을 채택하였고 민주연합여당이 있는 나라이다.

몽골(Mongol)이란 용어는 원래 “용감한” 이란 뜻을 지닌 부족 명이었으며 징기스칸에 의해 통일된 몽골 부족의 발전에 따라 민족명(Mongol)으로 변화되었다. 과거에 사용되던 蒙古(몽고)라는 명칭은 중화사상을 가진 중국인들이 주변민족을 몽매한 야만인이라고 경시하면서 청나라 이후 몽고라고 부른데서 유래했기에 적절한 표현이 아니다. 1924년 사회주의 혁명으로 수립된 당시 국호가 “몽골인민공화국”(People`s Republic of Mongolia)이었으나, 1992년 민주화이후 신 헌법에 의해 “몽골”(Mongolia)이 되었다. 우리가 보통 몽골이라고 하면 독립국 몽골을 말하는 것이며, 내몽골이라고 부르는 내몽골 자치주는 중국의 영토이다.

ㅇ수 도 : 울란바타르(Ulaanbaatar, “붉은 영웅”이라는 뜻), 북위 48°위치

ㅇ정부 형태 : 국회중심의 이원집정부제(의원내각제적 성격이 강함)

ㅇ독 립 일 : 1921.07.11(구 소련 적군(赤軍)과 연합하여 중국에서 독립)

ㅇ국가선포일 : 1924.11.26 (구소련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사회주의 국가됨)

ㅇ공 용 어 : 할흐 몽골어. 문자 : 키릴문자(러시아문자 차용)

ㅇ국 화 : 연 꽃

ㅇ문 자 : 키릴문자(1946년 이후 러시아 문자를 차용하여 사용하고 있다.)

<국가의 상징 >

ㅇ소욤보 : 표의 문자로서 몽골의 자유와 독립을 상징하는 전통 문장이다. 이 소욤보는 1924년 제 1회 대인민회의 에서 민족문양 으로 정해졌다. 제일 윗부분 불꽃모양은 융성, 재생, 향상, 번영을 상징하고, 그 아래에 태양과 달은 몽골의 백성, 삶, 영광을 뜻한다. 가운데 부분의 역삼각형과 사각형은 ‘모든 사람에게 성실하게 봉사하라’는 상징이고, 가운데 태극모양 같은 것은 태극문양이 아니고 두 마리의 물고기이다. 두 마리 물고기는 방심치 않는 것이며, 두 마리는 남성과 여성을 상징한다. 그리고 양쪽에 수직으로 세워진 사각형은 요새와 성벽을 의미한다. 소욤보 문양은 국기(國旗)에도 들어가 있으며, 몽골 국가, 정부 기관의 상징으로 모든 레터지, 명함 등에도 들어가 있다.

ㅇ국기(國旗) : 일명 소욤보 기(旗)라고도 부르는데 직사각형이 3등분 되어있고 중앙은 청색, 양측은 적색이다. 깃대에 연결되는 좌측 적색부분에 황금색의 국가 문양 소욤보가 그려져 있다.

역사

이미 알려진 대로 몽골인 들은 800년 전쯤에 문자가 도입되기 전까지 그들의 수세기에 걸친 역사를 음유시인들이 노래한 입으로 전해져 온 서사시로 기록하였다. 주변국가와의 많은 접촉(대부분 불행하였지만)으로 인해 몽골에 대한 역사가 주변국가에 의해 많이 쓰여졌다. 5000년 전의 중국왕조 역사에서 몽골인과 그들의 선조 들에 대해 언급하였는데 몽골인 들을 중국산 물건에 욕심이 많은 파괴적인 야만인으로 묘사하였고 늑대와 흡사한 사람으로 취급하였다. 고고학적 발굴에서 고비(Gobbi)와 몽골의 다른 지역에서 500,000년 전 인간의 흔적이 발굴되었다. 유목형식으로 가축을 기르는 것보다 먼저 농업이 시작된 것처럼 보이고 몽골의 짧은 여름에도 불구하고 밀농사를 유목생활과 병행하여 1000년 동안 지속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유목하며 가축을 기르는 생활을 선택한 직후에 말, 야크, 낙타를 길들였다.

몽골이라는 이름은 중국의 당 왕조(618-907 AD)때 처음 사용되었다. 그 시대에 몽골에는 위구르(Uighurs)인과 튀르크인 들이 여러 개 의 도시를 세우고 거주하고 있었다. 위구르인은 기독교 신앙에 영향을 받았고 몽골을 지배하게 된 후에 여러가지문제로 고민하고 있던 중국의 당 황제를 도와주러 간 후  그들을 내부의 반란으로부터 지켜주었다. 위구르인들은 대부분의 몽골지방을 840AD에 키르그즈(kyrgyz)인(지금은 중국의 청진(xinjiang)지방에 살고있다)이 공격하기 전까지 지배하였다. 몽골에 남아있는 키르그주(kyrgyz)의 유물은 아래로 내려쓰는 서체이다 - 비밀역사 서사시와 그 후에 나타난 모든 몽골 문서는 1940년대 스탈린이 강제적으로  러시아시릴(Russian Cyrillic)문자로 대치하기 전까지 아래로 내려쓰는 서체로 쓰였다.

몽골은 북아시아의 다른 유목민들과 동맹을 맺는 경우는 없었고 12세기말까지 같은 부족 내에서 자유로운 부족간 동맹이 더 많았다. 테무진(Temujin)이라는 20살의 몽고청년이 출현하여 대부분의 몽골부족을 연합하는 성과를 올린 것은 12세기 후반이었다. 1189년 그는 징기스칸이라는 명예로운 이름을 부여받았다. 그 의미는 '세상의 왕'이라는 뜻이다. 어떠한 몽골 지도자도 이처럼 효과적으로 몽골인 들을 통합한 경우는 없었다.

몽골인들이 몽골어로 징기스칸(Chinggis Khaan)을 경외시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징기스칸은 서양 난폭자들의 기억에 강한 인상을 남겼다. 철자가 틀린 것뿐만이 아니다 유럽인에게 그의 이름은 무자비와 전쟁의 화신으로 남아있고,  몽골사람들에게 그는 강함, 유일함, 법과 명령으로 인식되어있다. 그는 양립하지 않는 부족들을 단합하고 충성스러운 군사를 모으고(200,000명 이상)격심한 반목을 종결시켰으며 몽골인 에게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 젊은 왕이었다. 징기스 는 오늘날의 카라코린(kharkhorin)에 수도를 세웠고 중국과 러시아를 향해 그가 신뢰하는 기병대(몽골의 우수한 타키말로  구성되었다)를 출병시켰다. 1227년 그가 세상을 떠났을 당시 몽골제국은 베이징에서 카스피해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징기스칸의 손자인 쿠빌라이칸(Kublai Khan)(대략 1216-94)은 중국을 완전히 정복하여 송 왕조(960-1279)를 멸망시키고 원 왕조를 출범시켰다. 쿠빌라이는 곧바로 몽골제국의 확장이 한계에 도달하였음을 인지하였다. 싸움을 위한 전쟁을 찾아다니는 대신에 쿠빌라이는 방대한 제국을 함께 더욱 굳건히 지키는 것을 선택하였다. 이것이 몽골의 최고 전성기였다. 제국은 한국에서 헝가리까지 뻗어나갔고 남쪽으로는 베트남까지 도달하여 세계사에서 가장 큰 제국으로 남게 되었다. 몽골은 중국과 러시아를 잇는 도로를 만들었고 유럽국가와 의 무역을 추진하였다. 빠른 속도로 중요한 메시지를 가지고 넓은 대륙을 횡단해야 하는 사람을 위해 수천 필 의 말이 항상 준비되어있었다.

중국에서 몽골의 원 왕조는 기근해결사업을 모색하였고 시골에서 도시로 식량을 운반하기 위해 만든 운하를 확장하였다. 지폐를 통화의 유일한 방식으로 시행한 것도 이때가 처음이다. 마르코폴로와 다른 여행자들이 중국을 방문하고 그들이 본 것에 대해 기술하여 지식이 없었던 유럽인들에게 소개하였다. 중국에서  몽골제국의 장대함은 한 세기가 지나도록 계속되었다. 1294년 쿠빌라이칸 이 죽은 후 몽골은 그들이 지배하던 사람들에 의해 끌려 다니게 되었다. 그들은 특별계급층으로 평판이 매우 나빴으며 세금면제를 받았고 몽골제국은 권력을 얻기 위해 경쟁하는 파벌들로 넘쳐 났다. 14세기 중반 명 왕조 의 첫 번째 황제는 몽골을 베이징에서 추방했다. 60,000명 이상의 몽골인 이 몽골로 되돌아가는 바람에 원 왕조는 붕괴되었다. 그들의 연합은 붕괴되었고 전쟁은 자주 발발했으며 길고 긴 몰락의 시대가 이어졌다.

몽골이 불안한 시대를 거치는 동안에 몽골의 오랜 적이었던 만주인 들은 청 왕조를 세웠다(1644-1911).그들의 군대는 용맹하였지만 만주인 들은 처음에 몽골에 대한 침략을 시도하지 았다. 사실 그들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 몽골은 그들 스스로 무너지고 있었다. 서쪽의 준가(zungar) 몽골 족은 동쪽의 칼카(Khalkha)몽골 족과 격렬한 전쟁을 벌였다. 칼카족의 심각한 실수로 인해 준가 족이 전쟁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것처럼 보였다. 칼카족은 만주의 청 왕조를 끌어들여 군대를 파병하길 바랬다. 대부분의 몽골 족처럼 준가 족 병사들도 말 등  에서 활을 쏘는 숙련된 병사들이었다. 그러나 만주는 머스킷(Musket)총과 대포라는 새로운 기술을 가지고 있었고 몽골인 들은 전쟁을 수행조차 못했다. 1732년 준가 몽골 족 은 회생할 수 없을 정도로 패배하였고 몽골은 만주차이나(manchu China)의 지배하에 놓였다.

만주족은 1800년경까지 정당하고 매우 합리적으로 중국을 통치하였다. 그 후에 청 제국은 점점 부패와 독재성을 띄게 되었다. 중국과 몽골의 소작농들은 무자비하게 노동력을 착취당했고 많은 세금을 징수 당했으며 약간의 반항에도 비인도적인 처벌을 당해야했다. 결국 몽골은 반란을 도모하려고 많은 시도를 하였다. 1911년 중국의 청 왕조가 멸망하였을 때 몽골은 재빨리 기회를 포착하였고 1911년 12월 1일에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때 몽골은 젭준담바(Jebtzun Damba: 살아있는 부처)의 지도하에 신권정치를 지향하는 정부를 세웠다. 1915년 5월25일 몽골에게 제한된 자치권을 부여한다는 내용의 카야카다조약(Kyakhta)에 몽골, 중국, 러시아가 서명했다.

1917년 10월에 있었던 러시아 혁명은 몽골의 귀족정치에 충격을 주었다. 러시아가 약해진 틈을 이용하여 중국은 1919년 몽골로의 진격명령을 내렸고 수도를 점령하였다. 1921년 초에 후퇴한 백러시아(White Russian)의 반공산주의 군대가 몽골로 진군했고 중국을 내몰았다. 야만적인 중국과 러시아군대로 인해 몽골은 독립에 대한 열망은 불타올랐다. 시베리아에서 백러시아군대에 비해 러시아 공산당이 확실하게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몽골의 민족주의자들은 러시아 공산당에 도움을 청했다. 같이 힘을 합쳐 1921년 6월에 올란바토르를 다시 되찾았다. 몽골의 불교지도자는 명목상의 대표로서 계속 유지되었고 새롭게 구성된 몽골인민당(몽골역사에서 첫 번째 정당이었고, 그후 69년 동안 유일한 정당이었다)이 정권을 이어받았다.

1924년 11월26일에 몽골인민공화국(MPR)을 선포하였고 몽골은 세계에서 2번째 공산국가가 되었다. 몽골 공산주의는 1920년대 후반 스탈린(Stalin)이 절대권력을 장악할 때까지 소련정부의 영향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충분히 유지되었다. 하지만, 숙청은 곧 시작되었다. 스탈린의 앞잡이인 코루지니초이발상( Khorloogiyn Choibalsn)이 몽골의 지도자로 선출되었다. 초이발상은 스탈린의 지휘에 따라 토지와 가축을 몰수한 후 소작인들에게 재분배하였다. 1932년 700명 이상(대부분 승려였다)이 투옥되거나 살해당했으며 그들의 재산은 압류 당하고 공영화되었다. 농부들은 협동농장에 강제로 투입되었다. 개인사업은 무너졌고 중국을 비롯한 외국무역상들은 추방당했고 모든운송수단은 국유화되었다.

정부의 종교반대운동은 특히 무자비하게 진행되었다. 1937년 공포의 시간이 수도원에 도래하였고 수천의 승려들이 체포되거나 사형 당했다. 1939년에 27,000명 정도의 시민이 사형에 처해졌으며(그 당시 몽고 인구의 3%에 다다른다) 그중 17,000명은 승려였다고 알려졌다.

1980년대 초기에 소련정부가 침체상태로 흔들리고 있을 때 몽골은 잠빈밧몽크(Jambyn Batmonkh)의 지도하에 있었다. 그는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에 의해 재정비소련의 지원을 받으며 지방자치권을 가지고 있었다. 밧몽크는 1986년 페레스트로이카 와 글라스노스트정책의(몽골에서는 일토드(il tod)로 알려졌다) 조심스러운 시도를 종용하였다. 1980년대 후반에 중국과의 관계가 서서히 개선되었고, 1989년 완전한 외교상의 관계가 다시 확립되었다. 소련연방의 붕괴는 몽골의 자치권인정에 대한 불이행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따라서 몽골에서는 소련의 붕괴정도에 신경을 쓰거나 그 순간을 기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990년 3월 올란바토르의 국회건물 앞 광장에서 과거의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대규모의 집회를 가졌다. 모든 것은 순식간에 일어났으며 밧몽크는 권력을 상실했다. 새로운 정당이 생겨났고 격렬한 시위와 항의는 계속되었다. 5얼에 정부는 헌법을 수정하여 1990년 6월부터 다수정당 선거제도를 허용하였다. 아이러니 하게도 공산당이 선거에서 승리하였다. 올란바토르의 유권자들은 다른 정당에 많은 지지를 보냈으나 외곽의 시골지역에서는 공산당에 대한 지지가 압도적이었다. 공산당에서는 여러 명 의 젊은 민주주의 자들과 힘을 나누겠다고 발표하였다. 언론, 종교, 집회의 자유가 모두 보장되었다. 4년 후 1996년 6월30일 선거에서 몽골민주연합은 뜻밖에도 집권 몽골공산당(MPRP)을 참패시키고 75년 동안 깨지지 않았던 공산정권에 종지부를 찍었다.

주요 여행지

울란바토르

외국인들에게는 UB라고 불리는 몽골의 조용한 수도인 울란바토르는 이제는 한물간 1950년대 유럽풍의 도시형태와 느낌을 간직하고 있다. 구 소련제 자동차와 버스들은 서서히 새로운 일제 자동차와 버스로 교체되고 있지만 여전히 소들이 거리를 거닐고 염소들이 쓰레기 더미를 뒤척이며 전통의상을 입은 남자와 여자들이  몽골의 벼락부자들과 거리를 함께 거닌다.툴(Tuul)강을 따라 세워졌으며 아름다운 산으로 둘러싸인 울란바토르는 공산국가형식의 고층아파트건물이 있는가 하면 약 250,000명의 지역주민이 도시주변의 확장된 게르가 밀집한 교외지역에 살고 있다. 펠트천으로 만들어진 게르는 나무로 만든 울타리를 가지고 있어 특히 봄철에 심한 바람을 막아준다. 지형 상으로 산중턱에서 도시를 내려다보기에 매우 좋으나 겨울철에는 공해로 인해 보기 어려우며 기온이 상당히 내려간다. 도시의 중심은  수헤바타르(Sukhbaatar) 광장이다. 이곳에서부터 1921년 혁명의 영웅인 뎀디니수헤바타르(Damdiny Sukhbaatar)가 중국으로부터 몽골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 광장은 또한 1989년 결과적으로 공산주의를 무너뜨렸던 집회의 첫 번째 장소이기도 한다. 평상시에 이곳은 조용한 곳으로 비둘기와 3류 사진사들만이 배회하고 있다. 회색의 주 의회건물이 광장을 마주하고있고  높이가 높은 현대적인 문화의 궁정(Palace of Culture)은 유용한 건물로서 인상적인 몽골아트겔러리와 다른 몽골문화에 관련된 전시물들이 있다.

광장에서 한 블록 북서쪽에 있는 자연사박물관(Museum of Natural History)은 만약 시골로 가려면 한번 방문하는 것이 좋다. 이곳에는 몽골의 지리, 동물, 식물 에 관해 것들이 전시되어 있고, 최근의 몽골역사에 대한 전시물도 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2개의 공룡 뼈로서 고비에서 발굴된 것이며  고기를 먹는 거대한타보사우르스(Tarbosaurus)와 이것의 첫 번째 사촌으로서 오리너구리 부리를 가진  초목을 먹는 작은 사우로포스(Saurolophus)이다. 자나바자르 미술박물관(The Zanabazar Museum of Fine arts)에는 회화, 조각에 관련된 훌륭한작품들이 전시되어있고 이중에는 존경받는 조각가, 예술가 그리고 승려, 자나바자르들의 작품도 포함되어있다. 또한 탕카스(tangkas; cloth painting)와 불상 등과 같이 보기 힘든 종교적 색채의 전시물들이 있다

19세기가 시작될 무렵 100여 개 이상의 티벳 불교 썸(sum; 사원)과 키이드(khiid; 수도원)가  50,000명 이상의 울란바토르의 신자들을 위해 헌신하였다. 대부분의 사원과 수도원 및 그것들에 속한 소유물들은 1930년대 후반에 스탈린주의를 지향하는 사람들에 의한 숙청작업으로 모두 파괴되었다. 간단테친렌 키이드(Gandantegchinlen Khiid)는 외국인들에게 보여주려는 의도 하에 파괴되지 않고 유지될 수 있었다. 대략적인 의미로 ' 완전한 즐거움을 위한 최상의 장소'인 간단(Gandan)은 울란바토르에서 가장 볼만한  관광지 중의 하나이다. 이곳에는 금과 은으로 장식된 웅장한 사원이 여러 개 있다. 이곳에 사는 150명 이상의 승려들이 많은 찬불과 의식을 행하며 사원을 생활의 일부분으로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다

복트칸(Bogd Khaan)의 겨울별궁(Winter Palace) 역시 가 볼만한 곳이다 1893년과 1903년 사이에 세워진 이곳은 몽골의 8번째 복트칸(살아있는 부처)과 마지막 왕이 20년 동안 살았던 곳이다. 어떤 역사책을 보는 가에 따라 다르겠지만 복트칸은 육식과 술등의 불경스러운 즐거움에 취해있었고 매독으로 맹인이 되었다고 쓰인 역사서가 있는가 하면 그가 신통한 예언자였으며 민족주의자라고 쓰인 역사서가 있다. 그가 1924년 죽었을 때 소련이 이끌던 몽골의 공산당은 그를 대신하는 어떠한 사람도 나오지 못하게 금지하여 몽골의 불교지도자는 더 이상 나타나지 못하게 되었다. 겨울별궁에는 6개의 사원이 있으며 복트칸에게 바친 선물들이 수집되어있고 박제한 동물들을 환상적으로 세워놓은 곳도 이곳에 있다.

가. 간단사원

ㅇ 1838년 제5대 보그드한(Bogda khan : 왕조의 사원중 가장 역사가 깊은 사원으로서 사회주의시대 종교의 박해로 그 기능을 상실했다가 90년 민주화 이후 민족문화의 부흥운동과 함께 국민들의 정신적 지주로 복원

ㅇ 관음대불 : 관음대불전내에 위치한 높이 26m의 대형 불상(사회주의시절 파괴되었으나,1997년 현위치에 복원)

나. 국립역사박물관

ㅇ 1931년 인민혁명박물관으로 개관하였으며, 인류 역사 시작이래 몽골의 역사와 문화를 볼 수 있는 4만여점 이상의 역사유물, 고고학 및 민족학 자료 소장

다. 국립자연사박물관(시내)

ㅇ 1924년 개관하였고 몽골의 자연에 관한 풍부한 전시품을 소장

- 자연과학관 : 공룡골격표본 등 동·식물, 광물자원 표본

- 고고학관 : 선사시대 이래의 석기 등 유물

- 민족관 : 징기스한 스톤 등 역사자료

라. 차강송호르(시내에서 30분)

ㅇ 1991년 징기스한을 기념하는 관광지를 몽골 전국에 설치한다는 목표하에 1차적으로 울란바타르시 근교에 Chinggis Khuree(징기스 城)이라는 관광단지를 조성.

ㅇ 1990-92년간 제작된 ‘징기스한’영화의 소품 및 이동식 ‘게르’(몽골전통 천막)를 그대로 옮겨 놓았으며, 게르 박물관에는 징기스한 군대의 갑옷, 칼, 창 등 진품 7점을 전시

ㅇ 예약으로 몽골전통예술 공연 관람 가능. (약 1시간)

마. 자이산 전망대(시내)

ㅇ 1939년 일본과의 할흐강 전쟁에 참가한 소련군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1954년 건설

바. 이태준 의사 기념공원

ㅇ 세브란스의대 1회 졸업생인 이태준 의사는 1914년 몽골에 입국하여 ‘동의의국’이라는 병원을 설립, 몽골인의 ‘화류병’치료와 대한독립운동에 매진하다가 러시아 백군에 체포되어 순국하신 분으로서 이 분을 기념하여 2001년 재몽골한인회가 몽골의 성산인 보그드산 앞에 공원을 조성

Four Holy Peaks 신성한 4봉우리

울란바토르를 둘러싸고 있는 4개의 봉우리는 신성한 것으로 여긴다. 테스트시검(Testseegum), 친겔타이(Chingeltei), 송지노카이르칸(Songino Khairkhan) 과 바얀거크(Bayansurkh)산은  나침반상의 4위치와 어느 정도 일치한다. 이러한 봉우리들은 하이킹하기에 매우 좋은 장소이고 유명한 낙엽수림, 대초원과 매력적인 조류와 아이벡스(야생염소)와 검은담비 등과 같은 동물들이 있다. 테스트시검울(Tsetseegum Uul)은 가장 장엄한 봉우리로 취급된다. 테스트시검울의 높이는 2260m(7400ft)이며 울란바토르의 남쪽을 내려다보는  복트칸울(Bogdkhan Uul)산맥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이다.

Kharkhorin (Karakorum) 카라코람

1220년 징기스칸은 카라코람에 그의 방대한 몽골제국의 수도를 세우기로 결정하였다. 건물은 징기스칸이 죽은 후 그의 아들인 오그다이칸(Ogedai Khan)에 의해  완공은 되었으나 카라코람이 수도로서 사용된 것은 쿠빌라이칸이 지금의 베이징으로 수도를 옮기기 전까지 40년간만 사용되었다. 수도를 옮긴 후 몽골제국은 계속해서 붕괴되었고 카라코람은 버려졌으며 나중에 약탈자들과 같은 만주족 군인 에 의해 파괴되었다. 어떤 것이든지 남아있던 것들은 16세기에 에르덴주(Erdene Zuu)수도원을 세우는데 사용되었다. 이 수도원은 스탈린주의를 지향하는 사람들의 숙청작업동안 심각하게 파괴되었다. 카라코람의 현대적이고 적막한 도시는 같은 장소에 세워졌다. 에르덴주(수많은 보물 이라는 뜻)는 몽골 라마교의 본산지였다. 수도원은 1586년에 짓기 시작했으나 300년 후가 되어서야 완공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60에서 100개의 사원과 외곽벽안에 위치한 300여 개의 게르가 있으며 매우 높은 곳에 있어서  1000명 이상의 승려들이 살고 있다. 카라코람과 같이 만주족의 침입으로 사원은 버려진 후 파괴되었다. 스탈린의 암살단원에 의해  에르덴주에 있는 사원 중 3곳을 제외한 모든 사원이 파괴되었고 수를 알 수 없을 정도의 승려들이 살해당했다. 수도원은 1965년에 종교적 장소로서가 아닌 박물관으로 다시 개방할 때까지 문을 닫고 있었다. 공산당이 무너지고 나서야 수도원은 제 기능을 다시 시작 할 수 있었다.  

오늘날 이곳은 그전의 영광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거대한 벽이 복합적으로 이곳을 둘러싸고 있고 3개의 사원 안에는 유년시절, 청년시절 그리고 성년시절의 3단계 부처 생애를 기리기 위해 헌납되어있다. 주 사원이며 중심사원은 부처의 주(Zuu of Buddha)라 불리며 어릴 때의 부처 상이 있다. 수도원 벽의 외곽은 2개의 '거북 돌'이다. 이것들 중 4개는 한때 고대 카라코람의 경계를 나타내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남근형태의 돌로서 걸어서 30분 정도 걸리는 위치에 있는 수도원을 내려다 보고있는 언덕중의 작은 계곡사이에 숨겨져 있다. 이 돌을 보고 온 모든 여자는 24시간 내에 성 관계를 가져야 한다는 그 지방의 전설이 있다.

카라코란은 울란바토르에서 남서쪽으로 370km(230mi) 떨어져 있다. 7월에서 9월까지는 도시사이를 운항하는 비행기가 일주일에 여러 번 있다. 년 중 운행하는 버스는 7-8시간 정도 걸리며 자주 있는 편이다.

Khovsgol Nuur 홉스굴누르

2760sq km(1080 sq mi)넓이에 물이 너무나 깨끗해서 마실 수 도 있는 고산지대호수를 상상해 보아라 그리고 나서 2000m(6560ft)높이를 가진 많은 산과 무성한 소나무 숲 과 싱싱한 목초지 와 그곳에 방목하여 기르는 야크 와 말을 상상해 보아라 그러면 심장이 멎도록 웅장한 몽골에서 가장 멋진 풍경을 가진  홉스굴누르(Khovsgol Nuur)에 대한 막연한 느낌을 가진 것이다. 이곳은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깊은 호수이며 세계에서 14번째로 큰 상수원지역이다. 러시아와 국경지대에 위치해 있는 이 호수는 이곳을 '어머니'로 취급하는 지역 몽골인들 에게 신성시되고 있다. 이곳은 물고기로 가득 차 있고 주위에는 양, 아이벡스, 공, 무스, 200여종의 조류가 서식하고 있다. 호수주위에는 안내자 없이는 찾기 힘들지만 수많은 동굴이 있다. 이 지역에는  다크해드몽골족(Darkhad Mongols), 부리아트족(Buryats) 과 타스탄(Tsaatan)와 같이 3개의 독립된 종족들이 살고 있다. 경탄할 만한 90개의 강이 호수로 흘러들어 오지만 한 개의 강만이 호수에서 흘러 나간다.  에진골(Egiin Gol)이 그것으로 최종적으로 시베리아의 바이칼호(Baikal)에 다다른다. 홉스굴누르는 겨울에 얼고, 그 때문에 시베리아에서 가로질러 오는 연료를 운반하기 위한 거대한 도로로 사용된다. 이 호수가 녹았을 때 방문객들을 카약을 즐길 수 있고 그 주변에서는 하이킹이나. 말타기(또는 야크타기)를 즐길 수 있다.

홉스굴누르의 남부 경계는 울란바토르에서 775km(480mi) 북서쪽으로 떨어져 있고 임시항공기나 버스 또는 지프를 손수 운전하여 갈 수 있다. 이곳을 방문하기 위한 최적의 시간은 춥고 호수가 얼어있기는 하지만 봉(4월부터 5월까지)이다. 여름(7월과 8월)은 따뜻하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모인다. 호수를 방문하기 위해서는 허가가 필요하다. 허가는 카트갈(Khatgal)시의 남쪽입구에 도착하기 몇 킬로미터 전에 있는 홉스굴누르 국립공원으로 가는 주도로에서 얻을 수 있다.

ㅇ몽골인들의 유목은 주로 계절 따라 크게 네 차례 이동을 한다. 봄과 가을의 목초지는 서로 근처에 있고 여름과 겨울은 비교적 멀리 떨어져 있다. 겨울을 나는 목초지는 물이 없는 지역을 골라 판자를 쳐서 주위를 둘러 바람이 들어오지 않도록 막고 지붕도 만들어 눈으로 부 터 가축들을 보호한다. 물이 없는 지역으로 정하는 이유는 주위에 물이 있으면 다른 지역의 가축들이 물을 먹으러 와서 주위의 풀까지 먹고 가기 때문에 물이 없는 곳으로 정하는 것이다. 물은 겨울동안 천지에 깔린 눈으로 해결을 하면 되기 때문이다. 여름은 풀이 무성히 자라는 시기라 이때 가축들을 배불리 먹여 살을 찌우기 위하여 자주 가까운 거리를 이동한다. 그리고 남는 일손은 8월부터 겨울날 준비를 하기 위하여 건초를 장만하러 한 달이 넘게 달구지를 가지고 집을 나선다. 한 달이 넘는 기간동안 가능한 많은 건초를 장만하지 않으면 길고 혹독한 몽골의 추위에 가축들이 생존의 위험에 빠지기 때문이다. 몽골 인들의 유목은 정처 없이 가축들을 몰고 떠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반경 40킬로미터 내외에서 이루어진다. 가축이 많을 경우라도 이 거리를 넘지는 않는다. 개인들의 목초지는 법으로 정하여 지는 것이 아니라 묵시적인 약속에 의하여 정해진다. 우선 타 지역에서 이주해 온 사람은 주위의 형세를 파악하고 물과 풀의 상태와 민가들의 분포상황을 완전히 알고 방묵을 시작하여야 한다. 몽골은 지형에 맞는 가장 이상적인 가축의 수는 약 1억 마리까지로 산정되고 있다. 그러나 인구의 부족으로 인하여 그 3분의 1정도에 미치는 적은 수가 방목되고 있기 때문에 목초지를 가지고 서로 분쟁을 하는 경우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몽골인들의 이동생활에 적합한 전통 가옥인 게르는 양털을 누벼 물이 새지 않도록 단단하게 만들어 졌으며 보통 한 가구가 3채의 게르를 친다. 성인용, 어린이용, 그리고 창고용으로 이용한다. 이동을 위하여 철거하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한 시간 반 정도이고 설치를 하는 시간은 3시간 정도 필요하다. 물론 전문가의 경우에 해당하고 혼자서 하는 경우는 이것의 몇 배의 시간이 들어간다. 양이나 염소는 우리 안에 가두어 밤을 나고 소나 말은 풀어서 방목을 한다. 아침에 모두 모아 와서 물을 먹이고 젖 을 짠 다음 다시 풀어준다. 아침에 가축들을 모아오는 일은 남자들의 일이고 젖은 여자들이 짠다. 젖을 짜기 전에는 반드시 새끼에게 먼저 젖을 물리고 나서 젖을 짠다. 처음 짠 젖은 동쪽 하늘을 향하여 세 번 국자로 뿌려 하늘에 바치는 의식을 거행한다.

ㅇ몽골은 한국과는 달리 목축국가이다. 목축이라는 말은 유럽의 낙농국가와는 달리 가축을 몰고 이동을 하는 생활을 말한다. 몽골 인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가축의 개념과는 판이하게 다른 묵 축을 하고 있다. 우선 몽골 인들에게 몽골에는 가축이 몇 마리나 되느냐? 라는 질문을 하면 몽골 인들은 3,500만 마리의 가축이 있다고 대답을 한다. 그러나 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가축의 수와는 전혀 다른 숫자를 이야기 하는 것이다. 이유는 몽골 인들에게 가축이라 함은 5종 가축( 소, 말, 양, 염소, 낙타) 이외에는 가축이 아니다. 즉. 돼지, 사슴 등은 이 대답한 수에 포함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돼지도 기르고 심지어 사슴이나 순록을 치며 사는 특수한 부족들도 있지만, 이들이 기르는 것들은 몽골 인들에게는 단순한 동물에 불과한 것이다. 몽골인들에게 부의 개념은 얼마나 많은 가축을 소유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의 천마지기 만마지기 하는 식으로 천 마리 이상의 가축을 소유한 민가는 매우 부자로 취급을 받고 또한 열심히 일하여 가축의 수가 천 마리가 넘게 되면 이를 기념하기 위한 축제가 벌어지기도 한다. 보통 과거에는 소 한 마리와 말은 동급의 가치로 취급을 받고 양이나 염소 8마리가 소 한 마리와 같은 가치로 취급이 되었다. 이는 세금의 기준이었기에 실지 약간의 차이가 있었지만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가축의 수가 200마리 이상이면 살만한 사람이고 100마리가 안되면 삶이 조금 힘든 사람들이다.

게르

ㅇ몽골 인들의 전통가옥을 게르(Ger)라고 하는데, 중국에서는 파오(Bao)라고 부른다.

이 게르는 유목생활을 위한 설치와 철거가 매우 간단하며 겉의 재질은 양털을 누벼 만든 ‘팰트’라고 불리 우는 두꺼운 천이고, 안에는 ‘한’이라고 부르는 가는 나무를 마름모 모양으로 엮어 만들어 이것으로 벽을 만들고, 지붕은 마치 나무로 된 큰 우산살 같은 것을 펼쳐 가운데 버팀목을 댄 것이다. 설치는 숙련자의 경우 3시간 정도면 설치가 된다. 물론 철거는 더 간단하다. 게르의 규모는 ‘한’(나무 벽의 수)에 따라 다르다. 보통 4개에서 5개의 ‘한’으로 이루어지는데, 직경 4미터 정도이고 문은 항상 남쪽을 향하게 설치를 한다. 이 민가를 방문하여 문을 열고 들어가면 왼쪽으로 가서 앉는다. 몽골 인들의 풍습은 문에 들어가 왼쪽이 방문객의 자리이다. 오른쪽은 집 안주인의 자리, 즉 주방이 되는 곳이고 문에 들어가 정면은 집 주인장의 자리이다. 가운데 지붕을 바치고 있는 나무기둥 앞에는 화로가 있고 그 화로 위에는 언제나 차나 우유가 담긴 솥이 올려져 있다. 한국 사람들 중에 종종 몽골의 민가에 들어가 화로에 피고 있던 담배꽁초 등 휴지를 화로에 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집 주인에게 큰 실례를 하는 행동이기에 각별히 유의하여야 한다. 그 집의 기운은 아궁이에 있듯이 몽골 인들의 집의 길흉화복에 화로의 화신이 많은 비중을 담당하고 있다고 몽골 인들이 믿고 있다. 그리고 몽골민가를 방문하면 주인이 맛을 보라고 주는 음식은 그냥 내려놓으면 안 되고 반드시 맛을 보고 내려놓아야 한다. 현지인들이 대접하고자 하는 음식들이 냄새가 나고 비위에 맞지 않는다고 인상을 찌푸리지 말고 동방예의지국에서 온 손님답게 이들의 호의를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만약 우리가 집에 있을 때 낯선 사람이 찾아와 집에 들어가 구경 좀 하자고 하면 우리의 태도는 어떠할지를 생각하면서 이들의 미풍양속을 부러워해야 할 것이다. 아파트는 1960년대부터 건설되기 시작했으나, 아직까지 몽골인들의 아파트 거주율은 40% 수준으로, 대다수 국민이 게르에서 생활하고 있으며, 수도인 울란바타르 시에도 외곽지역마다 대규모의 판자촌과 게르 촌이 형성되어 있다.

ㅇ우리가 일반적으로 몽골 인들의 주식은 유목민들이기에 쉽게 육식으로 생각을 하고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몽골 인들은 언제나 소, 양, 말 등의 가축에서 나오는 유제품을 항상 섭취하고 있고 음식의 으뜸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에 바로 이 유제품이 이들의 주식이 되고 있다.

몽골인들이 이처럼 유제품과 육식을 주로 하기 때문에 몽골을 여행할 때 음식으로 인한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채소를 섭취하지 않기 때문에 봄이 되면 몽골 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계절이 된다. 비타민과 기타 필수 영양소의 부족으로 이 기간 사망률도 높고 건강에 많은 악영향을 미치는 시기이다. 그리고 몽골 인들은 물고기를 먹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금방 배가 고파지고 영양도 없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다. 실제로 몽골의 고양이에게 물고기를 주면 먹지 않는다. 난생 처음 본 물건을 대하듯 고양이가 물고기를 어색하게 생각하고 그냥 지나친다. 한국인들의 의식으로는 도저히 믿기 어려울 것이다. 유제품은 종류가 너무나 다양하기에 일일이 열거하기 어렵지만, 간단하게 몇 종류 설명을 하면 다음과 같다.

유제품류

- 뱌슬락 : 몽골 전통 치즈인데, 짠맛이 없고 서양 치즈보다 약간 단단하다.

- 으름 : 우유를 끓일 때 맨 위에 뜨는 유지를 굳혀서 만든다.

- 아롤 : 으름을 만든 뒤 남은 우유를 다시 끓여 으름처럼 굳혀 만든다.

- 수태차 : 우유와 찻잎을 같이 넣고 끓여 만든 차로 몽골 인들이 가장 즐겨 마시는 식품이다. 한국인의 보리차와 같은 개념이다.

- 쉬민 아리흐 : 우유를 증류시켜 발효하여 만든 술로 도수가 약하나 많이 마시면 정신을 잃을 정도로 센 술이다.

- 타락 : 몽골식 요구르트이다.

- 아이락 : 마유주라고도 하며, 말 젖을 가죽 푸대에 넣고 막대기로 1500-3000번 정도 저어 발효가 되면 그 다음날 이용한다. 일부 시골 어른들은 여름이 되면 다른 것은 먹지 않고 이 아이락만 하루에 10-15리터 마시며 생활을 한다. 6월부터 10월까지만 생산이 되고 남쪽의 고비사막지역의 마유주를 최고의 제품으로 여기고 있다. 몸속의 나쁜 찌꺼기를 씻어 준다고 하여, 마유주로 치료를 하는 요양소도 많이 있다. 처음 마시는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설사를 하는데, 몽골 사람들은 이런 과정을 거쳐서 장이 청소되는 것이니 당연한 일이라고 해석한다.

육류

ㅇ몽골 인들에게 고기는 혹독한 자연환경을 이겨낼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식량이다. 몽골 인들은 보통 하루에 일인당 200그램의 고기를 섭취한다. 불에 굽는 방법은 사용하지 않고 물에 소금을 넣고 삶아서 먹는다. 주로 소고기와 양고기를 몽골 인들은 즐겨 먹는다.

- 보쯔- 귀한 손님이 오거나 명절이 되면 우리의 고기만두와 비슷한 보쯔라는 만두를 빚어 먹는데 몽골의 설날에는 이 보쯔를 1500-3000개 정도 빚는다. 이 보쯔라는 말의 기원은 중국어의 ‘빠오즈(둘러 싼 물건)’이라는 말에서 왔을 가능성이 크다.

- 호쇼르- 손바닥만한 크기의 튀김만두로 종종 집에서 만들어 먹거나 사먹기도 한다. 이는 몽골 인들이 점심에 차와 함께 먹는 중요한 음식이다. 주로 쇠고기로 만들고 한국인들의 입에도 맞는 음식이다.

- 버르츠- 우리의 육포로 생각하면 된다. 겨울에 고기를 손가락 3개 정도 합한 두께로 잘라 말린 다음 해가 바뀌고 봄이 오면 이것을 차에 넣어 먹거나 국에 넣어 먹는다. 봄에 몽골 인들에게 중요한 단백질 공급원이 되기도 하고 멀리 떨어진 목초지로 이동할 때 주로 상용한다.

- 버덕- 주로 염소를 이용하여 만든다. 몽골의 진정한 전통음식이라고 할 수 있다. 만드는 방법이 매우 까다 로와 특별히 따로 기술자가 있어야 맛을 볼 수 있는 요리이다. 만드는 방법은 우선 염소의 머리를 잘라 그 안으로 손을 넣어 뼈를 발라 가죽이 상하지 않도록 꺼낸다. 그리고 그 사이로 뜨겁게 달군 돌을 넣고는 공기가 새지 않도록 잘 묵으면 된다. 겉의 털은 고기가 익으면 스스로 빠져 떨어진다. 다 만들어진 버덕은 보기에 흉칙하지만 맛이 좋고 특유의 노린내가 나지 않기 때문에 야외에서 외국인들에게 주로 대접하는 요리이다. 보통 3-4시간 정도 기다려야 맛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인내력이 필요한 요리이다.

- 허르헉- 뜨겁게 달군 돌을 이용하는 점에서 버덕과 비슷한 요리이지만 더 손쉽고 양고기로 한다는 점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우선 양을 잡는 방법부터 다르다. 우리 안에 있는 양을 고른 다음 산채로 양의 배를 10cm정도 가르고 손을 집어넣어 폐동맥을 손가락으로 끊는다. 삼  사분이 경과하여 양 숨이 넘어가면 조심스럽게 양의 가죽을 벗긴다. 그리고 양의 가죽을 펼치고는 그 위에서 양을 조각조각 각을 뜬다. 이 때 양의 가슴 안에는 심장에서 나온 피가 가득 고여 있는데 이를 그릇에 담아 내장에 넣고 삶아 피 순대를 만들어 먹는다. 내장들은 모두 삶아 먹는데 한국인들이 와서 이 때 양의 생간을 먹는 것을 몽골 인들이 보고는 기겁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리고 이고기 조각들을 양철통에 달군 돌과 함께 차곡차곡 넣고는 뚜껑을 닫고 김이 새지 않도록 잘 닫는다. 이때 양파나 마늘 등 한국인들의 입맛에 맛 게 양념을 가미할 수 있다. 뚜껑이 완전히 닫히고 40분 정도 있으면 달군 돌이 고기를 맛있게 익혀준다. 특이한 점은 이 고기를 익힌 돌을 나중에 꺼내 손바닥에 쥐고 있으면 혈압과 심장 등 몸에 좋다고 여기고 있다. 이 돌들은 고기를 익히고 나서도 손에 쥐고 있기 힘들 정도로 뜨겁다. 몽골 인들은 짐승의 뼈를 절대로 자르지 않고 관절을 꺾어 해체를 한다. 또한 가축을 잡을 때 되도록 빨리 숨이 넘어가도록 하고 이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주위의 사람들로부터 심한 욕을 먹는다.

(1) 모자-말개에

ㅇ몽골사람들은 여우가죽과 비단 천을 함께 이용한 모자를 즐겨 사용하였다. 긴 겨울과 혹독한 추위 속에서 살아가는 몽골 인들은 모자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모자를 중요하게 여기 기 보단 머리를 중요하게 여긴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모자에 관련된 몽골 인들의 풍습은 매우 다양하고 재미있다. 모자를 뒤집어 놓지 않는다. 항상 똑바로 놓은 곳에 둔다. 행여나 모자가 뒤집혀지면 질색을 하곤 다시 바르게 놓는다. 이유는 죽은 사람의 모자라는 뜻이다. 또한 모자를 가지고 장난을 치지 않는다. 사람의 가장 중요한 머리를 보호해주는 모자를 가지고 장난을 치다가는 주위 사람들에게 심한 눈치를 받는다. 이유는 잘 모르지만 모자를 두게 겹쳐 쓰면 결혼을 두 번 한다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에 몽골 인들은 모자를 두개 겹쳐 쓰지 않고 있다. 그리고 길에 떨어진 모자는 아무리 고가의 것일지라도 절대로 줍지 않고 그냥 지나친다. 몽골 인들은 전등갓이나 모자처럼 뚜껑이 아래로 향한 물건들은 서로 선물을 하지도 않거니와 그냥 주지도 않는다. 몽골사람들은 모자를 항상 놓은 곳에다가 둔다. 어느 장소를 가든지 그곳에는 항상 모자를 걸어두는 곳이 있으며 방문자는 인사를 나눔과 동시에 모자를 벗어 걸어두고는 자리에 앉는다. 현대의 몽골 인들은 과거 자신들이 사용했던 모자대신 러시아의 밍크 모자를 더 선호하여 겨울이 되면 이곳 몽골은 검은색의 밍크모자로 물결을 이루고 있다. 이 밍크모자는 백화점이나 일반 상점에 가면 쉽게 찾을 수 있고 다른 곳과의 가격차이가 많이 나지 않기 때문에 맘에 드는 물건이 있거나 구매를 원하면 그 자리에서 사는 것이 더 나을 경우가 있다. 왜냐하면 이곳 몽골은 자신의 신체 크기에 맞거나 또한 맘에 드는 색상이 언제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다량으로 구매를 하고자 하면 이곳의 자유시장에 가면 된다. 그러나 반드시 가이드와 동행을 해야 한다.

(2) 의상-델

ㅇ몽골 인들의 전통의상은 델이라고 부른다. 이 델은 원래 남녀의 구분이 없던 것으로 요즘은 색상으로 남· 녀 복의 구분을 하지만 원래 허리띠로 구분을 한다. 남자들은 전통의상인 델을 입고 4미터정도 되는 굵은 천은 허리에 감는다. 이 허리띠에 남자들은 단검과 부싯돌 그리고 기타 장식물을 두른다. 가장 친한 친구와 이 허리띠를 교환하며 우정을 나누기도 한다. 잠을 잘 때 허리띠는 풀어 반드시 머리맡에 두거나 잘 접어서 놓은 곳에 놓고 잔다. 여자들은 허리띠가 가는 한 줄로 되어있다. 사실 일이 많은 여자들이 남자들처럼 굵은 허리띠를 한다면 오히려 거추장스러울 것이다. 몽골어에도 남자들을 부스테(허리띠가 있는), 여자들은 부스구이(허리띠가 없는)라고 부르고 있을 정도로 허리띠는 이들에게 매우 중요한 존재인 것이다. 몽골 델의 옷깃은 만주의 영향을 받아 매우 흡사한 형태로 바뀌었다. 원래는 우리의 것과 비슷한 옷깃을 가지고 있었으나 청의 지배시기 옷깃이 중국스타일로 변형이 되었다. 그리고 소매가 길어 접어서 사용하고 윗사람에게 무엇인가를 받을 때는 반드시 접은 소매를 내린다. 몽골 인들은 주머니가 따로 없는 이 델의 품속에 거의 모든 물건을 넣고 다닌다. 외국인들은 한없이 물건이 들어가는 몽골의 델을 보고는 신기하게 생각한다. 혹독한 추위의 몽골 겨울에는 야생산양을 사냥하여 그 가죽으로 델을 만든다. 우리가 생각하는 무스탕의 일종인 것이다. 무게가 많이 나가지만 매서운 추위를 이기게 해주는 옷이다. 지금은 이 야생산양을 사냥하기 힘들기에 새로이 만들어 입기 힘이 들고, 또한 이 동물은 몽골의 서쪽 알타이산맥에 주로 서식을 하고 있기에 동쪽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은 구하기 힘든 옷이 되었다. 사회주의 시절 민족문화 말살정책에도 불구하고 이 전통의상은 몽골의 기후와 지형에 너무나 적합하기에 특히 지방에 사는 민중들이 서양식의 옷을 선호하기보다는 이 델을 선호하였다. 정부에서는 한 때 모든 정부 관련기관에 이 델을 입고 출입하는 것을 금지시켰지만 몽골 인들은 민주화 이후 이 델을 몽골의 공식의상처럼 외국의 국빈들에게 입히며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3) 신발-고탈

ㅇ한국인들 중에 몽골의 몽골씨름을 관심 있게 본 사람이라면 선수들이 재미있는 매 춤추며 이상하게 생긴 신발을 신고 등장하는 장면이 생각이 날 것이다. 이 굽이 없고 신의 코가 위로 올라와 있는 우스꽝스러운 신발은 고탈 이라는 몽골의 전통 신발이다. 이 고탈 을 신을 때 양말을 신고 신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말하는 발싸개라는 긴 천으로 발을 둘둘 말아 싼 다음 신을 신는다. 몽골 인들이 이 재미있는 모양의 신을 만든 이유는 추위를 막고 말의 등자에 발을 넣을 때 아무런 장애가 없도록 하기 위한 몽골 인들의 지혜가 담겨있다고 한다. 즉 유사시 어느 상황이든 말에 오르기 위한 순수 기마 민족의 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학자들은 두꺼운 통가죽으로 만든 이 신은 청나라 지배 시 반청분자들을 쉽게 굴복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청의 조정에서 장려하였다는 설도 있다. 그 이유는 굽이 없고 매우 무겁기 때문에 오히려 맨땅에서 자유로이 움직일 수 없다는 점을 이용한 것이다. 현대에 와서는 러시아의 영향을 받아 가죽부츠가 유행을 하여 점점 자취를 감추게 되었고 지방에서도 거의 찾아보기 힘든 물건이 되었다. 기념품상점에 가면 쉽게 찾을 수 있다. 가격은 품질에 따라 약간씩 다르지만 50불 이내로 구할 수 있다.

초, 중 고등학교(몽골 사립학교, 러시아학교, 중국학교)는 약 월 100$ 정도면 가능.

- 유치원(3-6세) 초, 중등교육(7-16세) 고등교육(17세 이상)

- 초, 중등교육학제 : 10학년제 (학기는 9월에 시작하여 6월에 끝난다)

- 초등교육(의무교육) : 6년으로 전국에 683개 초등학교가 있음.

- 중, 고등교육 : 4년

- 대학교육 : 4년 (대학교, 기술학교, 직업학교)

International School

국제학교(미국계)로서 초등학교, 중학교 수학가능하며 고등학교 과정도 있으나 국제공인을 받지 못한다. 학비 년 8.000$정도 (초등학교나 중학교 수업료는 별 차이가 없다.)

울란바타르 MK학교

한국인 선교사들이 현지 몽골에서 운영하는 울란바타르 MK학교(유치원, 초등학교)는 50%는 영어로, 50%는 한국어로 진행되는데 월 수업료는 유치원이 80$. 초등학교 150$이다. 형제가 2명 다닐 경우 20%할인된다.

대학교

국립대로 몽골국립대학, 과학기술대학, 사범대학, 상공대학, 경제대학, 의과대학, 농업대학, 직업학교 등이 있고 울란바타르 대학, 국제대학 등 사립대학을 포함하여 울란바타르 시내에 현재 대학교가 100개 이상이 있다.

몽골국립대학교(32-1402), 인문대학교(32-2072), 한국인이 운영하는 울란바타르 대학교(45-0179), 후래정보통신대학교(31-8530), 몽골국제대학교(MIU) 정도가 유학가능하다.

-입학요건 : 학교에서 면접 및 입학시험을 실시

-학제 : 4년제 (몽골대학생 학비 년 간 300-400$)

-외국인 언어과정 1년 : 년 1,800$이고 기숙사비는 월 50$이다.

기타 참고사항(종교, 풍속, 법규, 관습관련 유의사항)

• 정식국명은 몽골이며, 영어로는 몽골리아(Mongolia)임. 우리가 알고 있는 중국식 표기 몽고(蒙古-몽매한 야만인)는 거부감을 일으키므로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음.

• 7.11-13간 '나담'(축제)행사가 개최되며 씨름, 활쏘기, 말경기를 함.

• 한국과 마찬가지로 몽골에서도 '차강사르'(음력설)를 지냄.

• 몽골사람은 도살할 가축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기 때문에 사람을 손가락으로 지목하면 큰 실례가 되므로 반드시 손바닥을 위로 펴서 가리켜야 함.

• 몽골에서 식탁을 두드리는 것은 생사를 결정하는 싸움을 신청하는 것이기 때문에 조심해야 함.

• 어린애들이 귀엽다고 엉덩이 또는 어깨를 두드리는 것은 상대방을 무시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조심해야 함.

• 몽골 국민은 대체적으로 외국인에게 호의적이기는 하나 개방이후 수도권에서 외국인을 많이 접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 중 일부는 외국인들에게 여러 가지 수법을 동원 사기행각을 벌이는 경우도 있으니 주의 요함.

• 종교는 불교(라마교)가 일반적이나 중동 회교 국가처럼 특별히 종교 관습 또는 종교법에 의해 외국인의 일상생활 및 행동을 통제하는 경우는 없음.

• 노천 야외시장 "자흐"에서 몽골인들의 상거래 상황을 배경으로 사진을 촬영할 경우 가끔 돌을 던지는 경우도 있고, 일부 젊은이들이 시비를 걸거나 돈을 요구하는 사례가 있으므로 주의를 요함.

• 출입국시 세관신고서에 외환 신고를 정확하게 해야 하며 출국시 신고액 이상의 외환을 소지했을 경우 압수당할 수도 있음.

• 아국인 여행객중 녹용, 웅담, 사향, 호랑이나 곰 가죽, 공룡알 등을 구입하여 반출하려다 공항 세관에서 적발되어 압수당하는 경우가 있음.

• 골동품의 경우 ART SHOP 등에서 구입하고 관계 기관에서 반출 허가서를 받아야 공항 세관 통과 가능

• 화물로 발송한 짐표(좌석표 배부시 여행사 직원이 비행기표에 부착해 줌)는 몽골에 도착해서 짐을 찾아 공항문을 나설 때 공항직원이 회수하므로 잘 보관해 두어야 함.

□ 몽골 목민 가정 방문 때 주의 사항

o 왼손으로 문을 열고 오른발부터 들어간다.

o 들어갈 때 문지방을 밟으면 안 된다.

o 문짝이 둘일 때 들어가면서 오른손으로 문을 잡아서는 안 된다.

o 몽골전통집인 게르에 들어가고 나올 때 고개를 숙인다. 그렇지 않으면 머리를 부딯쳐서 다칠 수 있다.

o 집에 들어가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다.

o 집주인이 좌석지정을 해 주지 않으면 들어가서 남성은 왼쪽으로, 여성은 오른쪽에 앉는다. 만약 오른쪽에 공간이 없으면 왼쪽에 앉는다.

o 연장자나 인솔자가 상석에 앉는다.

o 가정방문 때 차나 마유주를 대접받는데, 이를 거절해서는 안 되며, 맛을 본 뒤 내려놓아도 된다.

o 유제품 등의 먹거리를 접시에 담아서 내면 손을 대서 맛을 봐야 한다.

o 코담배로 인사를 청하면 조심스럽게 오른손으로 받아서 향을 맡은 후 뚜껑을 살짝 연 채로 돌려준다.

  만약 주인이 허락하지 않으면 옆사람에게 돌려서는 안 된다.

o 차나 마유주가 든 그릇을 바닥에 놓아서는 안 된다.

o 가정방문시 미처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아이들에게 사탕을 선물하거나 집주인과 담배로 인사를 주고 받아도 된다.

□ 가정방문시 금기 사항

o 기둥에 기대고 서거나 앉기

o 두 기둥 사이로 지나다니기

o 문 정가운데에 서기

o 화로에 쓰레기 버리기

o 연장자의 면전으로 지나가기

o 물건을 받을 때 왼손으로 잡기  (반드시 오른손으로 주고 받을 것)

o 타인의 모자 써보기  (만약 써볼 경우 모자 안쪽에 침을 2-3번 뱉고 써 볼것)

o 손님들끼리 외국어로 오래 말하기

o 칼로 사물을 지칭하기

o 불을 향하여 발뻗고 앉기

몽골인 가정을 방문할 경우에는 하찮은 것이라도 반드시 선물을 준비하는 것이 예의다. 대개 보드카 1병과 초콜렛이나 사탕 정도면 된다. 그러나, 상대방의 부인에게 무언가를 주고 싶을 때는 화장품 정도가 괜찮다. 설사, 시간이 없고 가게가 문을 닫아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돈을 주는 것도 일반화 되어있다 (깨끗한 돈으로 2,000 투그릭 정도면 알맞음). 집에 들어가서는 식구들에게 인사를 하는데 가장 연장자로 보이는 사람부터 ‘사잉 밴오?’(안녕하세요) 라고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면 된다.(명절날은 다름) 그리고, 주인이 권하는 자리에 앉아 주인이 권하는 수태차를 받는다. 가끔 몽골인들은 외국인이 불편할 까봐 신발을 신고 들어오라고 하는 경우가 있으나 벗고 들어가는 것이 예의이다.(아파트나 목조건물 등에서)

※ 몽골 게르(겔) 방문 시 다음 사항에 주의해야 한다.

  ① 문을 열고 들어가서 인사말을 한다.

  ② 중앙의 난로 옆에 좌우로 2개의 기둥이 나란히 놓여있는데 왼쪽 기둥의 바깥쪽에 서서 주인이 권하는 자리에 앉는다. 두 기둥사이로는 오고 가고 할 수가 없다.

  ③ 자리에 앉아서는 그들이 주는 수태차를 정중하게 두 손으로 받아 마신다.

  ④ 용무가 끝나고 나올 때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뒤로 되돌아 나오는 것이 아니라 앞쪽을 지나 오른쪽으로 돌아 나와야 한다.

  ⑤ 절대 문지방을 밟아서는 안 된다.

  ⑥ 인사말을 한다.

      * 명절날에는 인사할 때 서로가 팔을 벌리고 껴안으며 나이가 많은 사람이 젊은 사람의 뺨에 자기 코를 갖다 대고 냄새를 2번 정도 마신다.

시간관념

  몽골인들은 시간에 대한 관념이 별로 없다. 보통 30분 정도 늦는 것에 별로 미안해하지 않는다. 이는 급할 것이 없는 민족성에서 기인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렇다고 우리마저 그럴 수는 없는 일로써 그들에게 무언가를 느낄 수 있도록 약속시간을 정확히 지켜주는 것이 좋다.

검지손가락으로 사람을 가리키지 마라

  우리나라 사람들은 무언가를 가리킬 때 검지손가락을 사용하는데 이는 몽골에서는 대단히 실례되는 행동으로써, 상대방을 죽이겠다는 뜻이다. 따라서, 본인 모르게 이러한 행동을 했다면 즉시 사과를 하고 양해를 구하는 것이 좋다. 무언가를 가리킬 때는 손바닥을 펴서 가리킨다.

음주예절

몽골인들은 손님이 오면 항상 준비해둔 보드카 및 여름철에 시골에서 가져온 마유주(말젖을 발효시켜 만든 술로서 막걸리와 비슷한 맛임) 등을 권하는데 보드카는 조그만 잔을 이용하지만 마유주는 커다란 대접에다 가득 담아 준다. 술을 주고받을 때는 보드카의 경우 차를 마실 때와 같이 왼손바닥으로 오른 팔꿈치를 받쳐 잡으며 오른 손가락을 모아 술잔을 받으면 되고 마유주는 대접에다 주므로 두손으로 대접을 받으면 된다. 마유주는 처음 마시면 대개 설사를 하게 되는데 위장을 깨끗이 해준다고 하며 설사 후에는 몸이 아주 가벼워짐을 느끼게 된다. 마유주를 마시면 별로 취하지는 않고 배가 불러오는데 화장실을 자주 가게 된다. 또한 보드카나 몽골 아르히 등을 마실 때에는 왼손으로 술잔을 잡고 오른손의 네번째 손가락을 술에 대어 술을 묻힌 다음 얼굴 앞으로 갖다대어 먼저 하늘을 향해 엄지손가락으로 튀기고 다음엔 앞을 향해 그리고는 땅을 향해 튀긴 다음 입에다 갖다대는 것이 예의인데 마유주를 마실 때는 그럴 필요가 없다. 이는 하늘과 땅에 감사하고 또 인류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 몽골인들은 술을 마실 때 끊임없이 술을 권한다. 그렇다고 다 받아 마실 수는 없으므로 보드카의 경우는 조금만 입에 대어 예의를 표하고 술을 못한다고 정중하게 얘기를 하면 괜찮은데 마유주는 약하므로 최소한 1 대접 정도는 마셔야 한다. 몽골인들 얘기로는 술을 받을 때 3잔까지는 기본적으로 받아야 하는 것이 예의라고 하지만 적당한 핑계를 대고 정중히 거절하면 된다. 또한 한국은 술잔을 완전히 비우면 술을 따르지만 몽골에서는 술잔이 조금만 비워도 술을 따른다. 참고로, 몽골인들은 보드카나 마유주를 잘 받아 마시면 무척 대견스러운 듯 흡족해 하며 아주 좋아한다.

흡연

  몽골에서 흡연은 몇몇 장소를 제외하고는 가능하므로 주위를 살펴 금연표시가 없는 곳에서 피는 것이 좋다. 몽골 가정을 방문하다 보면 나이 드신 어른들이 있는 경우 인사를 할 때 그들은 소매춤에서 조그만 옥돌로 된 병을 꺼내어 정중히 건네준다. 이것은 하마링 타미흐(코담배)로서 두손으로 정중히 받아들어 뚜껑을 열고 뚜껑에 붙어있는 귀 청소기처럼 생긴 것을 구멍 속에 밀어 넣어 재(잎을 곱게 갈은 것)를 왼손가락 위(보통 둘째 및 넷째 손가락)에 조금 묻힌 다음 엄지손가락과 함께 비비면서 코로 들이마시면 되는데 진짜 들이 마시지 말고 시늉만 내는 것이 좋다. 처음 경험하는 사람들은 대개 들이마시는데 재채기가 끊이지를 않는다. 그리고는 다시 뚜껑을 닫아 정중히 두손으로 건네준다. 또한 공공기관에서 흡연 구역일지라도 옆 사람의 동의를 구한 후 피우는 것이 무난하며 손윗사람 앞에서는 담배를 되도록이면 삼간다. 이곳에서는 여성도 자유스럽게 담배를 피우며, 저항감을 표정에 담지 않도록 한다.

여자에게 나이를 묻는 것은 실례

  몽골에서 처음 만났거나 친하지도 않은 여자에게 나이를 묻는 것은 실례이며 제대로 가르쳐 주지도 않는다. 이때, 끈질기게 여자의 나이를 물어보거나 혹은 무슨 띠인지 물어보는 것은 무례한 짓이며 상대에게 여간 부담을 주는 행동이 아니다. 생일 등은 물어봐도 상관없으며 정 상대의 나이가 알고 싶으면 친숙해져서 부담이 없어지면 그때 가서 나이를 물어볼 수는 있다.

 ■ 쇼핑

  물건을 살 경우 돈을 지불하는 방법은 상점에 따라 크게 2가지로 나눌 수가 있는데 하나는 국영 백화점과 같이 여러 종류의 가게가 한 주인에게 속해있는 경우에는 물건을 고른 후 그 물건의 가격을 종업원으로부터 받아 직접 계산대에 가서 돈을 치르고 그 영수증을 다시 종업원에게 갖다 주어야 한다. 이때, 종업원으로부터 영수증을 받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다른 한 가지는 슈퍼나 시장과 같이 개인이 자기 가게를 운영하는 경우에는 물건을 고르면서 돈을 지불하면 되는데 대형 슈퍼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경우 영수증이 없다. 몽골에서는 아무리 물건을 많이 산다해도 깎아주거나 덤으로 서비스를 주는 법이 없으므로 애석해 하지 말기를 바란다. 또한, 하르자흐나 텀자흐처럼 사람이 아주 많이 몰려드는 곳에 갈 때는 도둑을 맞기가 쉬우니 돈 간수를 잘해야 하며 그들과 부딪힌다 해도 화를 내거나 신경질을 낼 필요가 없다. 이곳에는 많은 몽골인들이 값싸고 좋은 물건을 사기 위해 항상 장사진을 이루는데 걸음을 옮기기가 힘들 정도로 사람이 많고 접촉이 심해 한번 갔다 오면 옷이 더러워져 빨아야 한다. 그리고, 계산시는 항상 다시 검사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 몽골인들은 계산할 때 거의 계산기에 의존하여 계산기가 없이는 정확한 계산이 나오지가 않는다.

 ■ 종교

① 몽골인들은 대부분 티벳 불교인 라마교를 믿으므로 타 종교와의 논쟁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② 사원 같은 곳에 가서 내부 및 신자들이 절하는 모습 등 촬영은 가급적 삼가도록 한다.


Posted by 롤링다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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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11.17 19: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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